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직 대통령 사면 건의 카드를 꺼낸 데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통합의 해”라고 밝히면서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여부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여권 지지층이 사면에 반발하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11일 신년사에서 ‘통합’ 대신 ‘포용’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일단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이날 서울대 연구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국론 분열 등으로 정치의 역할이 절실했던 지난해 대통령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라며 “대통령이 통합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의 진원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만큼 차기 정부를 위해서도 사면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 교수는 “지난해가 다수의 폭정으로 얼룩진 ‘정치 실종의 해’로 전락했다면 올해는 ‘정치 회복의 원년’으로 삼아 국민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보 진영은 1980년대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여당은 ‘민주적 통제’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보수 야당은 산업화 신화에만 매달리지 말고 보수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새해 들어 전직 대통령 사면과 통합이 정치권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전직 대통령 사면은 시간을 끌수록 문재인 정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면 과정을 돌이켜보면 1997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김영삼 정부 때 구속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부담을 김대중 정부까지 끌고 가지 않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DJ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던 대통령의 사면을 요청한 셈이다. 이런 게 정치다.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사면한다면 어떤 조건도 붙여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대승적 차원에서 조건 없이 사면을 결정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당초 기대했던 것만큼 소통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은데.
△코로나19 사태에다 국론 분열 등으로 어느 때보다 정치의 역할이 절실했던 지난해 대통령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국정 운영의 최고책임자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이어야 할 대통령이 야당 대표도 만나고 민감한 정치 현안을 조정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기자회견 횟수는 6회에 불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150여 회, 이명박 전 대통령 20회였던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고 박근혜 전 대통령(5회)과도 단 1회 차이가 난다.
-현 정부에서 삼권분립 등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이 사실상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철저하게 청와대에 종속됐고 행정부는 자율성을 잃어버렸다. 검찰 개혁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에 몰두하다가 개혁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정책 판단과 결정을 모두 청와대가 하는 비정상적 구조로 초래된 참사다. 세상이 대통령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국론도 분열됐다. 한쪽에서는 무조건 지지를, 다른 쪽에서는 극단적 부정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통합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의 진원지가 됐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유례없는 압승을 거둔 뒤 한국 정치가 되레 후퇴했다는 지적이 있다.
△21대 국회 개원 당시 상당히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174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타협과 배려의 정치가 아닌 오만과 독주의 정치를 일삼으면서 많은 국민이 실망했다. ‘양당 체제’가 아니라 여당 중심의 ‘1.5당 체제’가 굳어진 양상이다. 그런 실망감이 최근 문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남겼다.
-올해 4월 서울·부산시장 보선의 향배가 매우 중요할 것 같다.
△대선·총선처럼 중앙 권력의 향배가 바뀌는 선거가 아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정치적 부담을 갖지 않고 투표할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지역에 국한된 지방선거인데다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한 보궐선거다. 보선을 통해 밑바닥 민심을 읽을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4월 보선에서 정권 견제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보는가.
△국민들이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당에 표를 몰아준 것은 코로나19 위기에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리더십을 갖고 제대로 일하라는 절박한 요구였다. 하지만 여당은 모든 것을 장악해도 된다는 신호로 착각하면서 ‘다수의 폭정’을 일상화했고 극단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했다. 일자리는 증발하고 집값에다 전월셋값이 급등하는 등 민생까지 무너졌다. 민주주의에서 견제와 균형을 핵심 원리로 삼는 것은 권력의 전횡을 견제하고 각 기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인데 여당은 ‘민주적 통제’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오만한 여당에 대한 실망감 혹은 견제론이 이번 보선에서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것으로 본다. 임기 후반의 선거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집권당에 불리한 환경인데 만약 ‘망한 동네’라고 생각했던 야당이 부활에 성공하면 여당이 현 수준의 추진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야당이 대안 제시나 수권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총선 이후 국민의힘이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느낌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광주를 방문했고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과연 당내에 공감대가 있는 변화인지 의구심이 든다. 야당 스스로는 많이 변했다고 강조하지만 상당수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야당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은 지난 총선이 촛불과 탄핵의 최종 심판대였다는 것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여당에 표를 몰아줌으로써 국민이 야당의 원죄에 대한 심판을 마무리했다고 본다면 이제부터는 과거와 확 달라진 야당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보수 야당이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말인가.
△300년 넘게 보수당의 명맥을 이어온 영국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을 구한 영웅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1945년 7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뜻밖의 참패를 당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었다. 보수당은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당 조직 강화와 함께 당 노선 변화를 추구했다. 당의 ‘산업헌장’ 초안을 받아보고 처칠이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다. 젊은 당원들의 조직인 ‘영 컨서버티브(Young Conservatives)’를 만들고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내면서 국민들과 적극 소통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그런 노력 끝에 보수당은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우리 야당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지금처럼 패배주의에 젖어 있으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치열하게 공부하고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아직도 한국의 보수 정치라고 하면 박정희 시대 ‘산업화 신화’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 전체가 치열하게 토론하고 국민들과 공감하면서 절박하게 새로운 가치를 찾아 나서야 한다.
-진보 진영 역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시대 변화에는 훨씬 둔감한 것 같다. 1980년대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니 이분법적 사고에 머무는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재벌 개혁을 외치면서 서민 표만 공략하는 포퓰리즘에 젖어 있다. 내놓는 정책마다 후유증만 남기고 실패하는데도 수정·보완하기는커녕 오기의 정치를 일삼고 있다. 보수 진영은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이라도 받았는데 진보 진영이 과연 언제까지 안전지대에 머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의 궁극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치는 만능 해결책은 아니지만 다름과 차이로 발생하는 이해관계 충돌과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 통합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여당이 ‘선출된 권력’을 자주 언급하는데 외려 선출된 권력을 오독하고 있다.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했다는 것은 힘을 100% 행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타협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라는 요구였다. 우리 사회를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1차 책임은 힘을 가진 측이 져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극단적 분열과 갈등을 겪고 국민들의 고통이 가중된 것이다. 야당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국정을 함께 운영해야 할 파트너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만과 독선에 젖어 ‘정치 실종의 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집권당이 대화와 타협의 의회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앞장서고 야당도 필요할 때는 협력하고 건전한 비판도 하면서 ‘정치 회복의 원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He is...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거친 뒤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를 맡아 한국 정치·정당·선거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정당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한국 정치론’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한국의 선거 정치 2010-2020’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