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들께는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며 부동산 논란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 지난 2019년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부동산 문제는 우리 정부가 자신 있다”고 한 문 대통령이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1년여 만에 정책 실패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에서는 “너무 때가 늦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발표한 ‘2021년 신년사’에서 “특별히 공급 확대에 역점을 두고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주택 공급 방안을 신속히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설 이전에 서울 도심 재생 등을 기반으로 한 주택 공급 확대 정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민간의 공급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 카드도 검토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을 받은 고용 시장을 회복시키기 위해 “지난해보다 5조 원 늘어난 30조 5,000억 원의 일자리 예산을 1·4분기에 집중 투입하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총 160조 원을 쏟아붓는 한국형 뉴딜을 ‘지역 중심’으로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후 “대규모·초광역 프로젝트를 신속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의지도 강조했다. 새로운 글로벌 통상 질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구상이다. 그는 법원의 ‘위안부 판결’로 살얼음판이 된 한일 관계와 관련해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다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 무력 강화 공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지 않고 남북 협력의 중요성만을 재차 강조했다. 앞서 김 위원장이 우리 정부의 방역 협력 제안을 “비본질적 문제”라고 외면했으나 문 대통령은 “남북 국민들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협력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날 문 대통령의 신년사에 대해 부동산 전문가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공급 대책이 나와도 하루 아침에 공급량이 늘어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사면'의 '사'자도 안 꺼낸 文...이달 중순 신년 기자회견 주목 |
사면을 둘러싼 여론이 둘로 쪼개진 가운데 오는 14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선고 이후에야 문 대통령의 최종 입장이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이달 중순 문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신년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는 만큼 이 자리에서 사면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의중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새해 첫날 사면론에 불을 지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일단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보겠다”고 말한 뒤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대표는 친문 지지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후 여론의 추이를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에서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함구령이 사실상 내려진 상태다.
문 대통령이 사면에 대한 입장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신년사를 내놓은 것은 이에 대한 갈등과 고민이 그만큼 깊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앞서 한국갤럽이 이달 8일 공개한 여론조사를 보면 ‘현 정부에서 사면해선 안 된다’는 응답(54%)이 ‘현 정부에서 사면해야 한다’는 응답(37%)을 압도했다. 다만 야당 지지층과 60세 이상 연령대에서는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월등히 높다.
여권에서는 이 대표가 문 대통령과의 교감 없이 사면론을 꺼내 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표가 사면을 언급한 시점이 문 대통령과의 지난해 말 독대 직후라는 점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핵 '36번' 언급한 北...文 "핵무기 없는 평화 한반도" |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발표한 ‘2021년 신년사’에서 외교 분야와 관련해 △남북 협력 재개와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등의 방향을 제시했다. 취임 초의 신년사보다는 남북 관계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줄었으나 대화 재개를 향한 의지는 더욱 강해진 것으로 분석됐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맞아 ‘한미 동맹 강화’ 의지를 밝히고 냉각기가 이어지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 발전’을 강조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 개선을 강조한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핵 무력 증강 계획을 직전에 밝힌 북한의 행보와 대조를 보였다. 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더욱 고도화하겠다고 천명한 가운데 문 대통령의 발언은 “전쟁과 핵무기 없는 평화의 한반도”라는 원론적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을 향한 비핵화 촉구가 빠진 셈이다. 노동당 8차 대회 닷새째인 지난 9일 공개된 발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핵 잠수함’ ‘국가 핵 무력 건설 대업’ 등 ‘핵’이 포함된 표현을 서른여섯 번이나 사용하며 핵 증강을 외쳤다.
문 대통령은 이날 비대면 형식의 소통을 처음으로 제안하면서까지 남북 정상 간 관계 회복을 향한 변함없는 의지를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의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북한이 국경을 폐쇄한 상황을 감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 테이블을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방역을 고리로 한 남북 협력 카드도 다시 내밀었다.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북한과도 보건 분야의 공동 협력을 바란다”며 손을 내민 후 이어온 기조가 유지된 것이다.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는 ‘동북아 방역·보건 협력체’와 ‘한·아세안 포괄적 보건의료 협력’을 꼽았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깜짝 북미 대화를 성사시킨 도널드 트럼프 식의 톱다운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 속에서 우리 측이 주도하는 보건 협력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 측의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앞으로도 매우 희박해 보인다. 김 위원장은 8차 노동당 대회에서 우리 정부의 방역 협력안을 이미 평가절하한 바 있다. 그는 “남조선 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 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 들고 북남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중단된 남북미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도 밝혔으나 당장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는 오는 3월이 남북미 관계에 중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관계가 2018년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규정한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트럼프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미국 측에 요구할 경우 바이든 정부와는 마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야당은 문 대통령의 안보 인식이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형두 국민의힘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정은이 ‘판문점 선언 발표 이전으로 돌아갔다’는데 문 대통령은 고장 난 시계처럼 ‘상호 간 안전 보장’ ‘공동 번영’만 반복했다”며 “(북한이) 핵 주먹을 쥐고 휘두르는데 어떻게 악수를 하고, 어떻게 대화가 되나”라고 반문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당 비대위 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핵 잠수함을 건조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명중률 고도화 이야기를 했다”며 문 대통령을 향해 “북한 현실을 더 직시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달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며 일본 측이 반발하는 등 최근 한일 간 첨예한 대립을 감안해 원론적 수준의 언급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섣불리 언급하기가 지금은 묘한 상황이 됐다”면서 “관계 개선에 대한 한국 정부의 뚜렷한 입장을 발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홍우·진동영·허세민·김혜린 기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