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관계에 상대방이 동의했어도 음주 등으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면 강제추행이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첫 판례가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해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경찰공무원인 A씨(당시 28세)는 2017년 2월 새벽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우연히 만난 10대 B양을 모텔로 데려가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A씨는 B양에게 “예쁘시네요”라고 말을 걸었고 2~3분 대화를 나눴다. 만남은 술자리로 이어졌고 B양은 함께 간 술집에서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자기 시작했다. A씨의 주장에 따르면 B양은 “한숨만 자면 된다”고 말했고 A씨는 “모텔에서 자자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B양이 “모텔에 가서 자자”고 답해 함께 모텔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B양은 A씨를 만나기 직전 한 시간 사이 소주 2병을 마신 상태였다. 친구와 노래방을 찾은 A씨는 친구의 신발을 신고 외투와 휴대전화를 노래방에 둔 채 화장실로 갔다. B양은 화장실에서 구토 후 그 이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A씨를 만난 B양은 노래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고 B양 친구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1심은 B양이 추운 겨울에 외투도 없이 노래방에 간 일행을 찾아갈 생각도 못한 점을 비춰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보고 A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A씨는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당시 B양이 준강제추행 성립 요건인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2심 재판부는 모텔 폐쇄회로(CC)TV에서 B양이 비틀대거나 부축 받는 모습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점, 모텔 직원이 “두 사람이 모텔로 편안히 들어갔다”고 진술한 점 등에 주목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A씨의 혐의는 다시 인정됐다. 대법 재판부는 과연 ‘필름이 끊겼다’는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를 심신상실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점에 대해 주목하고 2년 9개월 심리를 진행했다. 심리 과정에서 ‘블랙아웃’ 재판에 대한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법원행정처를 통해 관련 외부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당시 친구 신고를 받은 경찰이 모텔방으로 찾아온 것을 알면서도 다시 B양이 옷을 벗은 상태로 잠들었던 점도 언급하며 “판단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피해자가 의식을 상실한 상태는 아니지만 알코올 영향으로 추행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으면 준강간죄나 중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필름이 끊겼다’는 진술만으로 알코올 블랙아웃의 가능성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충분한 심리로 심신상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구민 기자 kmsoh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