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休]황금빛 햇살, 용의 승천길 비추는 듯...소록도 품은 '고흥'

우주발사전망대 '해돋이 명소' 각광

용바위·사자바위 등 해안 절경 뽐내

길이 3,460m 이르는 소록대교 장관

조정래 문학 집대성 '가족문학관'도

남열해돋이해수욕장 옆 언덕 인근 우주발사전망대는 용바위·사자바위·팔영대교 등 해안 절경들과 어우러진 지역의 명소다.남열해돋이해수욕장 옆 언덕 인근 우주발사전망대는 용바위·사자바위·팔영대교 등 해안 절경들과 어우러진 지역의 명소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남도를 덮쳤다. 겨울이 대충 지나간 줄 알았는데 또 찬바람이 불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옷섶을 파고들었다. 해돋이가 좋다는 고흥의 아이콘, 우주발사전망대를 향해 새벽을 헤치고 가는 동안 해는 벌써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수평선에 걸친 햇살이 한낮의 백색광선 대신 노르스름한 황금빛을 쏟아냈다.




고흥군 우주발사대 인근의 용 조형물.고흥군 우주발사대 인근의 용 조형물.


남열해돋이해수욕장 옆 언덕 인근 우주발사전망대는 용바위·사자바위·팔영대교 등 해안 절경들과 어우러진 지역의 명소다. 특히 전망대 7층은 전망 턴테이블이 설치돼 회전하면서 사방의 경관을 둘러볼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다만 기자가 도착한 시간에는 문이 잠겨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인 듯했다. 우주발사전망대를 바라보는 데크 길에서 사진을 찍으며 산책로를 걷는데 인정사정없는 바닷바람에 손가락이 얼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소록대교는 육지인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다리로 길이는 1,160m에 달하는데 연결 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소록대교는 육지인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다리로 길이는 1,160m에 달하는데 연결 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소록도다.

소록도는 고흥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섬이다. 한때 한센병 환우들의 숫자가 6,000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600명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의 이 섬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해 근현대를 관통하는 슬프고 절절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애석하게도 이번 취재에서는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부분 고령자인 섬 주민들이 전염병 창궐 이후 외지인들의 섬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록도 안에서 관광객 안내를 하던 해설사 곽정아 씨도 섬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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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 소록대교를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소록대교는 육지인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다리로 길이가 1,160m에 달하는데 연결 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 12개의 교각이 다리를 받치고 있고 중앙에 탑 2개를 설치해 케이블로 상판을 연결한 형태의 현수교로 왕복 2차선 넓이다. 외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소록도를 거쳐 거금도로 향하는 차량들은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리를 위를 씽씽 달리고 있었다.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이 고흥에 세워진 것은 조정래 작가의 아버지 조종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이 고흥에 세워진 것은 조정래 작가의 아버지 조종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차는 북쪽을 향해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으로 향했다.

고흥으로 향하는 길에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였던 순천, 보성 벌교를 지나오면서 조종현·조정래 부자와 조정래의 아내 김초혜 시인의 자취를 한데 모아 놓은 가족문학관에 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태백산맥’과 관련한 문학관들은 소설의 무대가 됐던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고흥에 있는 가족문학관이야말로 조정래 문학의 시원(始原)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곳이다.

가족문학관이 고흥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조정래의 아버지 조종현 시조시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조종현은 열세 살에 불교에 귀의한 후 지난 1932년 중앙불교연구원 유식과(唯識科)를 졸업하고 그해 박성순과 결혼해 4남 4녀를 뒀는데 그중 차남이 바로 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다.

조정현은 한용운 시인과 더불어 불교청년회에 가담하면서 불교 학생 사상 기관지 ‘회광(回光)’의 주간을 맡았다. 1929년 동요 ‘엄마 가락지’를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1930년 시조 ‘그리운 정’을 동아일보에, 1931년 ‘성북춘회’를 ‘동광(東光)’에 발표하며 시조에 천착했다.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 별 총총 밤이 드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 (중략) /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말인가(조종현 시조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싶다’)’

불교 정서에 바탕을 둔 그의 문학은 아들 조정래를 배태했고 조정래는 아버지의 문학적 DNA를 소설로 치환해 시인 김초혜와 결혼했다. 1963년 현대문학에 ‘사월’로 등단한 김초혜는 평이한 시어를 사용해 간결하고 포근한 서정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들 일가족의 자취를 모아 놓은 문학관에는 조종현·조정래·김초혜 3명의 기록이 각각의 전시관으로 독립돼 있다. /글·사진(고흥)=우현석 객원기자


신경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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