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오니 산도 바다도 그동안 질리도록 봐오던 풍경도 더욱 간절하다. 꽃이 아니고는 봄의 새로운 기운을 느끼기도 어려운 시기, 이른 꽃놀이를 대신해 선택한 것이 산이다. 산으로 들어가면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자연의 넉넉함에 더해 운이 좋으면 봄꽃 흐드러진 풍경도 만날 수 있는 곳,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은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함양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에 걸쳐져 있다. 그중 함양은 지리산으로 가는 북쪽 관문이다. 함양 오도재에서 출발해 벽소령을 넘어 천왕봉으로 가는 고갯길은 지리산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다. 등산 코스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길을 옛사람들은 물산과 문화가 오가던 교역로로 이용했다. 그 출발이 가야 시대부터라고 하니 함양의 모든 역사는 이 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양 여행은 오도재에서 출발한다. 오도재는 함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자리한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쯤이다. 고속도로를 타고 왔다면 이미 함양의 절반은 거쳐왔다는 이야기다. 들머리는 함양과 하동을 연결하는 1023번 지방도. 여기부터 지리산으로 향하는 옛길이 시작된다. 시작점은 구절양장(九折羊腸) 지안재다.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이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 구불구불 휘어진 뱀처럼 이어진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순간 금방이라도 차가 뒤로 밀려날 것처럼 힘겨운 고갯길이다.
지안재는 오도재의 일부 구간에 불과하다. 급커브를 몇 번이고 돌아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드디어 오도재(해발 773m)다. 지리산 제일문을 통과해 지리산조망공원에 서면 천왕봉부터 하봉·중봉·백소령·형제봉·반야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도재는 상인뿐 아니라 깨달음을 얻으려 한 수많은 유학자와 수행자들이 넘었던 고개다. 정상에는 정여창·김일손 등 영남 유학자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리산 가는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1023번 지방도는 여기서 끝난다. 나머지는 도보로만 갈 수 있다. 원래 함양군 함양읍에서 하동군 화개면으로 이어지는 도로이지만 벽소령 구간은 미개통 구간으로 남아 있다. 여기부터는 지리산 둘레길 금계~동강 구간(11.5㎞)과 연결되는데 이 구간은 의중마을을 기점으로 용유담으로 가는 코스(11.1㎞)와 서암정사·벽송사를 둘러 가는 코스(12.7㎞)로 나뉜다. 대부분 완만한 용유담 코스를 선호하지만 지리산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서암정사·벽송사 코스를 추천한다.
굳이 멀리 돌아가는 서암정사·벽송사 코스를 추천하는 것은 두 사찰 때문이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년)에 벽송 지엄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수행했던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도 여기서 생겨났다. 특히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도인송과 미인송이다. 예로부터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 가지 소원이 이뤄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소원을 성취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970년대에 세워진 서암정사는 벽송사에 딸린 암자로 출발했지만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제법 신도 수를 보유한 사찰로 독립했다. 서암정사란 상서로운 큰 바위에 있는 수행처라는 뜻이다. 벽송사 주지 원웅스님이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희생된 원혼을 달래기 위해 조성한 굴법당은 입구 사천왕상부터 바위굴 내부의 불상 조각까지 일반 사찰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다. 대웅전 역시 대만 사찰의 후원으로 세워져 이색적인 분위기다.
벽송사와 서암정사는 1023번 국도를 타고 오도재를 넘어 60번 지방도(천왕봉로)를 이용하면 차를 타고도 갈 수 있다. 사찰 인근에 차를 세워두고 둘레길을 걸어도 되고 전체 구간이 부담스럽다면 일부 구간만 걸었다가 되돌아와도 된다. 송대마을과 세진대를 들러 세동마을부터는 용유담 코스와 다시 합류한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계절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도 함양에서 빼놓지 말고 둘러봐야 할 명소다. 함양 읍내 한가운데 자리한 상림은 신라 말 최치원이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다. 축구장 30개 크기의 광활한 면적에 갈참·졸참·상수리·개서어·개암나무 등 120여 종의 활엽수 2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동네 마실 가듯 위천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걸으며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다.
선비의 고장으로도 알려진 함양은 정자와 누각·향교·서원이 100여 개에 달한다. 벗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학문을 논하거나 영남 유생들이 한양길에 잠시 머물러 쉬어가던 곳이다. ‘선비문화탐방로’는 농월정부터 군자정·거연정까지 남강천을 따라 총 6㎞에 이르는 구간으로 선비들이 거닐던 숲과 계곡·정자의 자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탐방로 끝은 남계서원과 연결된다. 수동면에 자리한 남계서원은 일두(一?) 정여창(1450~1504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전국 9개의 서원 중 한 곳이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글·사진(함양)=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