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무비의 영향력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지난해 ‘기생충’에 이어 올해는 ‘미나리’다. 놀라운 흡입력으로 세계의 관객들에게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조연이라지만 그를 빼놓고는 영화의 완성도와 감동을 상상하기 힘들다.
영화로 시작했으니 필자에게 영감을 준 다른 작품도 이야기해보자. ‘히든 피겨스’는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이 미국을 충격에 빠트렸을 당시의 실화를 담고 있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다. 인공위성에서 선두를 뺏긴 미국은 곧 나사(NASA)를 설립하고 더 원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이 계획의 수장 앨 해리슨은 흑인 천재 수학자를 발탁했지만 나사의 백인 직원들은 그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만들고 수학 문제의 답을 구해도 스파이로 몰았다. 뒤늦게 사실을 안 해리슨은 분노하며 유색인 전용 화장실의 푯말을 해머로 부숴버린다. 미국이 여전히 팽배해 있던 인종차별의 구시대를 벗어나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신대륙의 열쇠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지난 2010년부터 경영자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실험실을 떠나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만 집중해도 성과를 낼 수 있던 연구와 경영은 사뭇 달랐다. 넘치는 요소보다 결핍이 성장을 좌우한다는 리비히의 최소율 법칙에 따라 부족한 곳은 없는지 조직 안팎을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연구가 빛나려면 관리와 지원까지 모든 영역에서 맡은 역할을 다해줄 구성원들이 필요했다. 그런 내게 “함께하지 않으면 정상에 못 올라가”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라는 영화의 외침은 큰 울림이었다. 인재를 구하고 이 구슬들을 제대로 꿰려면 리더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오랜 성찰 속에 필자가 찾아낸 훌륭한 팀의 조건은 이렇다. 먼저 진정한 팀원이 될 때까지 배려해야 한다. 팀워크는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이다. 공동의 목표와 스토리에 공감하고 내 역량을 모두 쏟아붓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런 동기부여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게 ‘기회의 공정’에 대한 믿음이다. KIST는 신입연구원에게 2년간 포스닥 활용을 지원한다. 이 기간에는 평가도 유예한다. 연구 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결과의 불평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출발선의 조정은 새내기들이 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시간도 제공한다.
팀스피릿(team spirit)은 정서적 일체감만으로 유지할 수 없다. 안정적 연구 환경과 재원 등의 현실 문제 해결도 매우 중요하다. 건강한 긴장감은 조직 발전의 필요 조건이며 공정한 평가는 충분 조건이다. 성과로 줄을 세우는 정량 평가가 아니라 성장 과정까지 주의 깊게 살피는 정성 평가가 필요하다. KIST가 마일리지식 평가 대신 다년 평가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복잡한 평가 단계를 과감하게 축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를 둘러싸고 하향 평준화나 무임승차에 대한 우려 또한 없지 않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연구자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자긍심과 국가적 소명 의식을 믿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