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기관마다 자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평가가 크게 달라 자체적으로 원인 파악에 나섰지만, 점수를 매긴 평가 기관은 기준을 모두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평가 기관이 여성 인재 채용에 관한 항목을 평가 기준에 넣는다면, 그 비중이 몇 %여야 몇 점인지 등 기업에 가이드라인이라도 좀 줬으면 좋겠다.”
최근 상장 대기업의 ESG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가 돈다. ‘열 길 물속보다 아리송한 것은 ESG 경영 평가 지표’ ‘ESG 경영 원칙이 뜨면 뜰수록 상담 역할을 자처하는 법무법인과 컨설팅 기업만 행복해질 것’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갑작스레 부상한 ESG 경영 원칙의 취지와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평가 기관마다 결과가 들쑥날쑥인데다 지표별 기준이 모호한 경우가 많아 혼란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이 같은 상황은 최신 경영 트렌드를 타고 평가 지표가 우후죽순 늘어났다는 이유 외에도 권위 있는 평가 기관조차 등급이나 점수를 매기는 기준을 뚜렷이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실제로 국내외 기업들이 ESG 경영 평가 지표로 주로 활용하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물론 다우존스(DJSI) 지속가능경영지수,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레피니티브,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언론이나 경제 단체 등 외부에 평가 모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외비라는 이유에서다. 지표의 세부 기준을 알기 위해서는 조사 대상 기업에 한해 일정 비용을 내야 한다. ESG 경영을 평가한다면서 지표를 영업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단적인 사례다. 장도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평가 기관에서 어떤 목적에서 기업의 ESG 퍼포먼스를 조사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어떻게 밟아 이러한 점수가 나왔는지를 공지하는 것은 성과 평과의 기본”이라며 “그러나 현재 이를 제대로 수행하는 평가 기관은 드물며 오히려 기업에 장사를 하려 드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윤 창출만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신뢰 구축을 통해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자는 ESG 경영의 당초 취지가 평가 기관을 자처하는 곳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털어놓았다.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의 고충을 고려해 산업통상자원부·생산성본부 등과 함께 한국형 ESG 경영 성과 지표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결과물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윤철민 대한상의 ESG 경영팀장은 “현재 국내외에서 ESG 경영에 관한 평가 지표가 난립하는 상태”라며 “대한상의는 정부와 연계해 대표성 있는 평가 지표를 수립하려고 하며, 생산성본부가 그 주체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내 ESG 경영 성과 평가 지표 가운데 상장 대기업에서 자주 활용하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ESG 평가가 급진적인 내용을 모범 규준에 포함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한국거래소가 출자한 공적기관이다. 이곳은 11년 만에 개정 작업에 돌입한 모범 규준 가안에 ‘경영 승계자 후보군과 이들의 교육제도 등 관리법을 정기적으로 공시하라’ ‘공시 허위 기재 시 임원의 성과 보수를 회수한다’ 등 현행법에서 규정하는 수준보다 더 엄격한 평가 기준을 포함시켰다. 현재 이 안은 기업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 단체는 이에 대해 “모범 규준 개정안은 경영 가이드가 아닌 규제에 가깝다”며 “ESG 관련 기업 규제를 집대성한 결과”라고 의견서를 작성했다. 특히 전경련은 경영 승계자 후보군 내부 규정과 인권 경영, 집중투표제 등의 사항은 현행법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아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모범 규준은 기업이 우선순위를 두고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며 해명했다. 그러나 재계는 연기금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스튜어드십 코드도 모범 규준에서 사실상 규제로 굳어졌다는 점, 과거 금융기관에 적용하던 모범 규준이 금융회사 지배 구조에 대한 법으로 입안된 전례가 있다는 점에서 바짝 긴장한 상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모범 규준은 입법을 선도하는 기능이 있다”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기업은 규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수민 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