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소녀에서 관능의 록시 하트로
‘너무 부끄러워 쳐다볼 수도 없다’(소녀시대 ‘GEE’)며 사랑 앞에 수줍어하던 소녀가 치명적인 매력으로 대중을 유혹하는 죄수가 되어 돌아왔다. 순수한 미소로 발랄한 노래와 안무를 선보이던 그 모습은 잠시 잊어주시라. 지금은 관능의 몸짓과 노래로 관객을 사로잡은 ‘록시 하트’의 시간이다. 뮤지컬 ‘시카고’ 21주년 공연에서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섹시 여죄수 록시 하트 역을 꿰찬 티파니 영(사진)은 그렇게 소녀의 시대를 지나 30대 아티스트로서의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티파니는 최근 신사동에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 참석해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시카고”라며 작품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티파니는 ‘시카고’에서 간통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힌 화제의 죄수이자 그 인기를 이용해 스타의 꿈을 꾸는 여인 ‘록시 하트’ 역을 맡았다. 티파니는 과장 조금 보태 ‘이 작품의 무대’를 꿈꾸며 30대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본 작품이 시카고예요. 그땐 막연하게 ‘내가 30대가 되면 저 작품을 할 수 있으려나’하는 생각을 했죠. 시카고는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였어요.”
“학생처럼 시카고만 팠어요” 200대 1을 뚫다
거짓말처럼 30대의 문턱을 갓 넘은 그에게 꿈의 기회가 왔다. 21주년 공연 소식에 티파니는 오디션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고, 그렇게 본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작품에 합류하게 됐다. 노래와 춤은 기본이었다. 작품을 향한 티파니의 열정은 국내외 스태프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다. “학생처럼 시카고만 팠죠. 1920년대 시카고 사진을 찾아보며 ‘아 나는 이런 도시를 걸어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라는 식으로 배경이나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오디션을 위해 2009년 이 작품에서 같은 배역을 연기했던 옥주현은 물론 소녀시대 멤버 수영의 언니이자 뮤지컬 배우인 최수진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얻기도 했다고.
오디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쉽지 않은 연습에 마음고생도 많았다. 시카고는 화려한 동작 대신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중요한 고난도 안무가 필수인데다 무대와 의상 전환이 거의 없어 배우들에게 잠깐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는 극한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어렵다는 아이돌 연습생 시절도 이겨낸 티파니지만, 시카고 연습은 “그걸(연습생·아이돌 생활) 훨씬 초월”했다. 본인이 이 작품의 오랜 팬이었기에 그만큼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욕심이 컸기에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면 더 애가 탔다. “연습 6주차 때, 법정 장면을 연습하다가 결국엔 눈물이 터졌어요. 그런데 타니아 나디니 협력 연출님이 이렇게 위로를 해주시더라고요. ‘네가 역대 록시 중 가장 늦게 울었다’고.” 스스로 “팀 복 많다”고 자랑할 만큼 동료들은 이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특히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 아이비와 민경아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됐다. “아이비 언니는 자기가 처음 이 작품을 준비할 때 모습이 생각난다면서 같이 울어 줬어요. (이번에 함께 록시 배역에 처음 도전하는) 경아와는 커피 사러 나갔다가 길 한복판에서 독백 연습을 주고받을 만큼 서로 많이 의지했고요.”
공연이 끝나면 써내려가는 특별한 기록
매일과 순간이 다른 ‘라이브 무대’의 매력을 100% 만끽하는 요즘이다. 예전 같았으면 특정 장면의 리액션 몇 개를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연기를 이어갔을 테지만, 지난 수개월의 맹훈련을 거치며 무대에서의 유연성을 몸에 익혔다. ‘무조건 열심히’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날의 분위기, 상대 배우의 에너지에 맞춰 최대한 자신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악기처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티파니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만의 노트를 정리한다”며 “연출진으로부터 그 날의 코멘트를 받아 ‘오늘은 왜 여기서 이렇게 했을까’, ‘왜 이 부분은 연결이 잘 안됐지’ 하고 되새기면서 수정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수정하고 보완해서 다음 날 또 도전할 수 있는 게 뮤지컬이고 무대 아니겠느냐”고 웃어 보였다.
도전 가득할 30대, 그 시작 열어준 시카고
언제까지나 소녀일 것 같았던 티파니도 이제 30대에 접어들었다. 10대 때부터 치열하게 내달리며 쌓아온 시간이기 때문일까. 여자 연예인으로서 나이에 민감할 법도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나이에 당당하다. 티파니는 “‘섹스 앤 더 시티’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30대라고 하면 멋지고 시크하고 쿨하고 도전정신이 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나와 내 주변도 그런 30대를 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말만 그럴듯하게 내뱉는 건 아니다. “옛날엔 창문만 바라보며 ‘난 디즈니 공주가 되고 싶어’라고 했다면 이젠 직접 움직이고 있어요. 꿈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이뤄지는 거거든요.” 미국 소속사를 설득해가며 본 시카고 오디션이 그 증거다. “내 30대를 시카고로 연다는 게 행복하다”는 소감이 더 진심 어리게 다가온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여전히 많은 티파니다. 그는 “늘 ‘이번에는 어떤 것을 보여주려나’ 하고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며 “사람들에게 내 음악과 작품이 희망과 힘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신시컴퍼니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