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시장이 최근 크게 성장하면서 사상 최대의 '뭉칫돈'이 몰리고 있지만 관련 업계의 도덕적 해이가 확산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조 단위 '엑시트(투자금 회수)' 사례도 많아지고 있지만 투자금만 받고 종적을 감추거나 회사 자금을 오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 2000년대 초 거액의 투자금으로 몸집만 불린 채 성과 없이 사라져버린 일부 닷컴버블의 붕괴 같은 부작용이 재연되지 않도록 당국과 업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으로부터 최근 대규모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A사의 한 임원은 회사 자금을 오용한 것이 투자사에 발견돼 해고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중에는 적자가 나는 스타트업이 대다수지만 투자금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유인도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창업자들은 정부로부터 투자금을 받은 뒤 업계에서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스타트업계에서는 수천만 원대의 청년 창업 지원금을 수령한 뒤 몇 개월 만에 폐업을 결정한 사례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면서 "투자만 받고 결과물을 내놓지 않아도 창업자의 신용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투자금으로 덩치만 키우고 성과는 뒷전으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성과 부담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스타트업 대표의 사례도 있다. 40대 스타트업 대표 B 씨는 지난해 성과 중압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20대 후반의 젊은 대표 C 씨는 과도한 업무량에 건강이 악화하며 수면 중 돌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빨리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 탓이 크다"며 "과열된 업계 분위기가 스타트업 대표들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젊은 창업가들이 겪는 심적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제2 벤처붐’으로 상징되는 스타트업 열풍 탓이 크다. 유동성 과잉으로 검증되지 않은 ‘블랙엔젤’ 투자자들이 스타트업계로 대거 몰려들어 거액의 투자금을 빨리 회수하기 위해 경영에 과도하게 간섭하며 창업자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스타트업계에 한층 건강한 투자 문화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벤처·스타트업은 코로나19 이후 혁신 성장을 주도할 산업"이라며 "정부과 관련 당국이 투자 확대와 함께 스타트업의 부작용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3년간 국내 액셀러레이터(창업 기획자)가 300개로 급증하며 이른바 ‘대(大)스타트업’ 시대가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그 이면에 과도한 창업 경쟁 및 투자 지원에 따른 부작용의 그늘도 짙어지고 있다. 건강한 기업 투자가 아닌 돈만을 좇는 일부 투자자들로부터 과도한 실적 압박을 받거나 정부로부터 투자만 유치한 채 결과물을 내놓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는 창업자들도 여럿 생겨나는 양상이다. 업계에서는 스타트업의 건실한 성장을 지원하는 맞춤형 관리 체계를 도입하는 한편 공공에서도 창업 지원금을 지급하기 전에 여러 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스타트업계에서는 생활 서비스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대표 A 씨의 극단적인 선택에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 많았다. 명문대 출신의 40대 A 씨는 스타트업 대표로 승승장구하며 겉으로 비치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돌연 극단적인 선택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업계 관계자는 “A 씨는 투자를 받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던 상황이었다”면서 “완벽주의 성향의 성격이어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그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과도한 업무 강도에 건강이 상해 지난해 말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수면 중 돌연 사망했다. 업계 관계자는 “평소 건강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돌연사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면서 “빨리 회사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과중해 지나친 업무 강도를 오래 유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표가 사망한 뒤 회사는 자연스레 폐업 수순을 밟았다.
스타트업 대표들이 겪는 심적 불안의 주된 원인으로는 건강한 투자가 아닌 단기 수익 창출만을 원하는 일부 벤처 투자자들의 압박이 꼽힌다. A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에는 빠른 시일 내에 투자금을 유치하고 회사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심적 압박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2 벤처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스타트업 시장이 커지면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블랙 엔젤’ 투자자들이 스타트업계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며 “인내심을 갖고 창업자들을 기다려주는 엔젤 투자자들과 달리 이들은 빨리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과도한 경영 간섭으로 창업자들을 힘들게 한다"고 말했다. 신생 스타트업이 안정적인 매출과 영업 이익을 내려면 통상 10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데 ‘한탕’을 노린 투자자들은 단기에 과도한 실적 압박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스타트업계 종사자가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점도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스타트업 대표가 정신 질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업계 내부에 낙인이 찍혀 후속 투자를 받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발언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국내의 한 업계 관계자는 “보통 창업 3~4년 뒤면 공황 장애나 우울증·불면증·조울증 등으로 정신과를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타트업 대표들의 정신 건강 문제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유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과 교수는 “정신 건강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스타트업 대표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럴싸한 창업 아이템을 앞세워 투자금만 유치한 뒤 성과는 뒷전으로 미룬 채 종적을 감추는 사례는 스타트업계의 가장 치명적인 독버섯으로 지적된다. 업계에서 도덕적 해이 문제가 심각한 이런 사람들을 ‘스타트업 상금 사냥꾼’으로 부른다. 업계 관계자는 “투자 업계에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리다 보니 생기는 문제”라며 “여러 단계의 철저한 검증 과정을 운영하는 민간 창업 재단에 비해 공공 기관 주관 운용사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한 공공 기관에서는 상대적으로 철저한 검증 과정을 운영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적으면 수천만 원에서 많으면 수억 원의 자금을 지원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업을 결정해도 큰 제재가 없기 때문이다.
스타트업계에 따르면 수천만 원대의 청년 창업 지원금을 수령하고 몇 개월만에 폐업을 결정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스타트업 창업을 빙자해 공공 기관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경우가 많이 발생해 큰 문제”라며 “직원 15명을 뽑아 한 명당 190만 원씩 정부 지원금을 받고 사업이 흐지부지되거나, 금액을 4~5배로 부풀려 개발자 외주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신청한 뒤 창업자와 개발자가 돈을 반씩 나눠 갖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는 창업자 각각에 맞춘 관리 체계와 철저한 투자 검증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무분별한 상금 사냥을 막기 위해 정부가 민간 창업 재단의 ‘필터링’ 과정을 차용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창업 활성화를 위해 지원 요건을 완화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공공 기관에서도 민간 창업 재단에서처럼 여러 단계의 필터링을 거쳐 검증된 인원에만 창업 지원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현 기자 dani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