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가난한 이들, 자유를 갈망하는 너희 모든 이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풍족한 해안에 비참하게 버림받은 이들, 폭풍에 시달린 집 없는 이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황금의 문가에서 내가 등불을 들고 있을테니.’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기단에 새겨져 있는 에마 라자루스의 시 ‘새로운 거상’ 중 일부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 동부 관문인 뉴욕에 들어선 후 이 시를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더 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국으로 모여든 이들의 후손은 과연 오늘날 미국 땅에서 자유의 여신이 약속했던 행복과 안녕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세계적인 경제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78)는 이 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불평등과 그로 인한 불만, 갈등으로 얼룩진 미국 사회를 개탄하면서 지금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생전 연설에 인용했던 ‘분열된 집은 일어설 수 없다’ 라는 성경 구절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신간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원제 People, Power. and Profits)’는 거시 경제학과 공공 경제학의 대가로서 오랫동안 불평등 문제를 통렬하게 비판해온 스티글리츠가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 길을 잃은 미국 정치·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2019년 미국에서 출간한 책이다. 바이든 정부 출범 이전에 집필된 책이지만, 트럼프 집권기에 드러나거나 더 악화했던 여러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과 제안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세계화와 그 불만’ ‘불평등의 대가’ ‘거대한 불평등’ ‘끝나지 않은 추락’ 등 앞선 저서들과 여러 논문들을 통해 지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세계화와 독점화, 금융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면서 트럼프 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지하 창고에 금이 점점 더 많이 쌓이고,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불어났으니 미국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믿음이다. 스티글리츠는 지금처럼 불평등 규모가 컸던 적이 없다며, 그 근거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워런 버핏을 지목한다. 이들 세 사람의 자산 합계가 미국 인구 하위 절반의 자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는 미국 경제의 상층에 얼마나 많은 부가 쌓여 있는지, 반면 하층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불평등이 커진 데는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영향이 크다. 그는 과거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에서 부를 빼앗아 오던 ‘부의 착취’가 오늘날 미국 경제에서 교묘하게 변형돼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기업이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근로자의 몫을 빼앗고, 혁신과 지식 추구가 아닌 지대(토지, 독점수익, 지적 재산권 등)로 부를 늘리고 있는데 정부는 이를 방치 하거나 심지어 입법과 정책을 통해 기업의 이러한 행위를 돕고 있다.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일구는 부는 국가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방관 속에 거대 금융회사들의 약탈 행위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이어졌으나, 원흉들은 건재하다. 또한 산업구조 변화, 세계화 과정에서 정부는 개인의 희생을 적절히 다루지 못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악화하는 불평등은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낙수효과론 역시 틀렸음을 입증한다.
스티글리츠는 경제 시스템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의 진정한 원천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생산성, 창조성, 사람들의 활력을 키우는 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인구 구조 변화에 대응해 이민자와 여성, 고령자의 노동 참여를 확대하고, 지대만 추구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과세를 강화하고, ‘좋은 세금’도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점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경쟁을 촉진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금융 회사가 작지만 창의적인 스타트업을 지원하게 하고, 정부 요직을 거친 자가 금세 금융회사로 향하는 회전문 관행도 막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아울러 지식의 원천인 고등 교육기관에 대한 투자를 늘리자고 제안한다.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불평등을 더 심화시키며 기형적인 인간과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인생은 더럽고 잔인하고 짧다.’ 스티글리츠는 책에서 인용한 16세기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말이다. 이 말에 공감하는 21세기 불평등의 희생양이 더 늘어나서는 안 되지 않을까. 2만3,000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