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가의 속성이고 숙명이건만, 사각의 캔버스 안에서 새 길을 모색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원로화가 샘 길리엄(88)을 향한 ‘캔버스를 해방시킨 자’ 라는 수식어는 자랑스러운 찬사일 수밖에 없다. 워싱턴DC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길리엄은 1966년 캔버스를 틀에 매지 않은 채 작업한 후 특수 제작한 ‘빗각 캔버스(Beveled edge)’에 고정시켰다. 대략 15㎝ 높이의 빗각 캔버스는 벽에서 튀어나온 듯 보이며 3차원적 인상을 풍겼다. 1972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미국관 최초의 흑인작가로 참가했던 그는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돼 주전시장 입구를 커튼처럼 늘어뜨린 캔버스 설치 작품으로 뒤덮으며 여전한 ‘현역’임을 과시했다.
샘 길리엄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용산구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17년 3월 한국 지점을 정식 개관한 페이스가 확장 이전 후 여는 첫 전시이기도 하다.
비스듬한 캔버스가 특징인 길리엄의 작품은 거칠고 투박한 첫인상을 풍긴다. 물감을 두툼하게 많이 쓰는 작가는 색을 겹치게 덧바른 후 손가락이나 갈퀴, 강철 붓 같은 도구를 이용해 그 표면을 긁어낸다. 흡사 밭을 가는 농부나 흙을 뒤지는 고고학자와도 같다. 미시시피 주에서 태어나 켄터키 주에서 자란 그의 원동력은 음악이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에게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는 길리엄은 “중요한 건 시간이다. 음악을 듣고 깨닫는 것, 소리에 대한 경험이 내 그림의 기준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의 즉흥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색상 선택부터 표현 기법까지 계획된 것 없이 순간순간의 감각에 의지한다. 때로는 작업실 바닥에 깔린 부스러기, 알루미늄 조각이나 비즈를 캔버스에 뿌리고 합판 조각이나 톱밥을 붙이기도 한다. 물감 속 이물질들이 숨어있던 진주처럼 반짝이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작가의 기량 덕분이다. 작가는 작업할 때마다 항상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되는 길리엄의 초기작은 간결한 기하학적 추상이었는데 1962년 워싱턴 DC로 이주하면서 과도기를 보냈고, 톰 다우닝 같은 ‘워싱턴 색채파’와 교류하면서 색의 활용이 더욱 깊어졌다. 이번 전시는 7월 10일까지 열린 후 페이스갤러리 홍콩으로 옮겨간다.
/글·사진=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