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제 정치, 국제 동맹은 지정학적이 아니라 기정학(技政學·기술 중심 정치학)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제 국제 정치의 패러다임이 기존 정치·경제에서 과학기술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광형(사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29일 서울 테헤란로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열린 ‘과학기술강국포럼 창립식’ 특별 강연에서 “전체적인 국가 산업 기술을 관리하고 전략을 세우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장은 기술 패권 시대에 ‘이념 동맹’은 가고 ‘기술 동맹’이 왔다고 규정했다. 이를 이해하는 데 ‘기정학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기술 동맹을 맺은 셈”이라며 “미국의 외교적 판단 바탕에는 한국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장은 이를 1940년대 미 방어선인 ‘애치슨라인’에 빗댄 ‘신(新)애치슨라인’으로 비유했다. 그는 “미국의 관점에서는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한국산 반도체가 꼭 필요한 점을 인식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신애치슨라인이 어디로 그어지느냐는 기술과 산업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무역 분쟁이 격화하면서 기술 패권 양상은 더 심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과거 국가 전략 산업을 위해 전 세계 시장에서 필요한 재료·부품을 값싸게 확보하는 게 중요했으며 국제 분업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가격보다 안정적 공급망 확보가 최우선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국제 정치를 참가자들이 서로 보여주는 패와 감추는 패를 갖고 경쟁하는 카드 게임에 비유했다. 전략산업 공급망의 중요성이 커지는 지금 히든카드는 현재는 예측하기 어려운 중요한 글로벌 기술과 가치 사슬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 총장은 “자신의 히든카드와 상대방 패를 알면 갑작스러운 공격에 방어 대책을 만들고 선제적 대응이나 억제력 확보도 가능해진다”며 “전체 패를 파악하기 위해 글로벌 기술 지도(테크 맵)를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기술 지도 구성 요소로 논문·특허·연구자 등의 파악을 통한 전략 기술 예측 및 동향 관리, 지식재산 포트폴리오 관리, 전략적 연구개발 등을 들었다. 그는 “이제는 지식재산도 전략적으로 획득하고 연구개발도 부족한 부분에 집중 지원해 결과물을 얻어야 한다”며 “이 같은 전체 산업 공급망을 관리하고 외교 라인에 조언해줄 수 있는 국가 산업 전략 컨트롤타워가 지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창립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과학기술강국포럼은 정부와 과학기술계의 소통을 강화해 국가 중요 정책 결정에 과기인들의 전문 소견을 반영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한국과학기술한림원·한국공학한림원도 포럼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