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밤을 샜다"…김홍빈 대장, 도전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광주시·산악연맹 사고 경위 밝혀





'열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57) 대장이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가운데 하산 도중 실종됐다.



20일 김 대장의 실종 경위를 광주시와 산악연맹의 발표로 재구성해보면 김 대장은 홀로 하산하다가 조난을 당했다. 이후 스스로 로프를 타고 오르다 줄이 끊어지며 추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대장은 17일(현지시간) 오후 11시 30분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북동부 카라코람산맥 제3 고봉인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 7,500m 지점에 차려진 베이스캠프(캠프4)에서 정상으로 출발했다. 당시 김 대장은 짐을 나르는 하이포터 4명과 함께 정상을 향했다.



일반적으로 고산 등반에는 여정을 이끌어가는 셰르파, 짐을 나르는 포터, 전문 짐꾼인 하이포터가 함께 동행한다. 하지만 당시 하늘깅이 막히면서 네팔의 셰르파들은 등정에 함께 하지 못했다. 고산 등반에 필요한 산소 구매도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장은 브로드피크보다 더 험난한 산도 등반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 열악한 환경에도 도전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등반 전 “네팔에서 셰르파나 산소가 올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정말 등반다운 등반을 해볼 수 있게 됐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다음날인 18일 오후 4시 58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했고 하산을 시작했다. 하이포터 1명이 캠프4에 먼저 도착했고 이어 3시간 뒤에 하이포터 3명이 캠프4에 도착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



등산보다 위험한 하산에는 조난사고의 위험이 커져 대원들끼리 줄을 묶고 함께 내려오기보다 따로 하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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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산을 시작했던 김 대장이 한참 동안을 내려오지 않았다. 먼저 내려온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와 연락해 김 대장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때까진 아무도 김 대장의 조난소식을 알지 못했다.

대원들은 김 대장이 18시간에 걸쳐 등반해 체력이 이미 바닥난 상황이었고 부족한 산소와 기압 때문에 안전을 우려했다.

/AP연합뉴스/AP연합뉴스


김 대장은 19일 0시께 해달 7,900m 지점의 크레바스(빙벽이 갈리진 틈)를 통과하다가 이미 조난된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 대장이 같은날 오전 5시 55분 한국에 위성 전화로 구조 요청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러시아 구조팀이 수색에 들어갔다.

김 대장은 당시 전화 통화로 “내가 조난을 당했다. 구조 요청을 한다. 밤을 샜다. 주마(등강기) 2개와 무전기가 필요하다”며 “많이 춥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께 크레바스 아래 15m 구간에서 조난된 김 대장이 발견됐고 곧바로 구조 작업이 시작됐다. 김 대장은 당시 의식이 있었고 구조대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구조대원 1명이 직접 내려가 김 대장에게 물을 제공했고 김 대장은 등강기를 이용해 직접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추위에 얼어있던 가는 등강기는 김 대장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졌다. 이에 김 대장은 크레바스 아래로 다시 추락했다.

오후 1시 42분께 러시아 구조팀으로부터 김 대장의 추락 사실이 베이스캠프에 알려졌다. 정부와 산악연맹은 파키스탄 대사관에 구조 헬기를 요청했고 현지 원정대와 파키스탄 정부가 협조해 수색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김 대장은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단독 등반 중 조난을 당했지만 구조됐다. 이 과정에서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산을 향한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김 대장은 2006년 가셔브룸2봉부터 14좌 완등을 시작해 2007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했으며 2009년에는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박동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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