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국정원도 놀랐다...'유령업체'까지 등장한 韓기업 기술유출 백태

[첨단산업 위협하는 기술유출]갈수록 교묘해지는 'K기술 빼가기'

경쟁사에 스파이 심거나 산학협력 명목 기업 자료 요청

中, 美 집중 견제 받자 '韓 반도체 소부장' 인력 조준

유럽 배터리업체는 '위장 자회사' 통해 인재 우회 흡수

기업들 방어 수단 마땅찮고 적발돼도 '솜방망이 처벌'



지난 2017년 설립된 유럽의 신생 배터리 업체 A사는 지난해 국내 대기업 B사의 에너지저장장치(ESS) 개발을 총괄했던 연구원을 계열 컨설팅사에 영입하려 했다. 경쟁 업체로의 ‘전직 금지 약정’을 피하기 위해 일단 컨설팅사에서 채용한 후 기술을 빼돌리려 한 것이다. 기술 유출 비상이 걸린 B사가 이 컨설팅사의 주소지 등을 파악한 결과 현재 ‘공사 중’이라고 나타나는 등 실체가 모호한 곳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2019년에도 역시 유럽의 한 배터리 업체가 국내 배터리 업체 임직원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퇴사 전 주요 기술 유출을 요구하다 국가정보원에 적발되기도 했다.

21일 업계와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전 세계적인 배터리·반도체 인력 확보 전쟁의 와중에 한국의 두뇌와 기술을 빼가기 위한 경쟁국들의 수법이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다. 경쟁국 기업이 우리 인력을 외관상 전혀 관련 없는 사실상의 ‘유령 업체’에 채용한 뒤 자사 연구에 은밀히 가담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 기업의 하청 업체에 접근해 기술을 빼가거나 내부에 스파이를 심는 방법도 성행하고 있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첨단 기술이 줄줄이 새나갈 수 있는 위기인 셈이다.



우리 기술이 전 세계의 타깃이 되면서 산업 기술 유출 적발 사례는 2016년 이후 집계에서도 100여 건을 훌쩍 넘어섰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올 6월까지의 산업 기술 유출 적발 사건은 111건에 달한다. 특히 이 가운데 국가 안보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기술 유출 사건도 35건이나 됐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기술 유출은 주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우리 주력 산업 분야에 집중돼 있다”면서 “핵심 기술 유출 사건의 경우 국가 안보와 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고 전했다.

문제는 기술 유출 수법이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데도 우리 기업들의 방어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보안 체계와 내부 인력 관리 등이 허술해 기술 유출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 등이 촘촘한 방첩망을 구축하고 있으나 기술 유출 범죄가 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산업기술보호법상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최고 형량은 ‘3년 이상 유기징역’이나 법원의 실제 양형 기준은 이에 크게 못 미치는 실정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2017~2019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1심 기준)된 사건 중 실형을 받은 경우는 3건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산업계는 미래 먹거리를 위협하는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법원의 양형 기준 상향을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충북 청주시 LG에너지솔루션 오창 제2공장에서 열린 K-배터리 발전전략 보고회에 참석해 국내 배터리 업계 신기술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기업 A사는 최근 경쟁 관계인 국내 한 대기업의 협력 업체에 연락해 이 업체가 생산한 신소재를 대량으로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이 업체가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정확한 ‘샘플’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우리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 곤란한 경우 협력 업체를 통해 타깃 기업에 납품한 샘플 등을 우회적으로 확보하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와 국정원에 따르면 우리 인력과 기술을 빼가기 위한 경쟁 국가와 기업들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년 내 한국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로 국가적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다. 국정원이 최근 전문 평가 기관 등과 함께 조사한 결과 주요 업종별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조선 5.3년, 반도체 5년, 2차전지 2~4년, 디스플레이 2년, 자동차는 1년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서치 업체에 대기업 기술 수집 의뢰

기술을 빼가는 수법 역시 가지각색이다. 국정원과 업계 전문가들은 우리 기술을 탈취하는 수법을 크게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쟁국 기업의 자회사 또는 외견상 그와 무관한 기업체로 위장해 국내 우수 인력을 빼돌리는 것이다. 최근 이 같은 방식으로 유럽의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가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업계의 인력을 영입하려다 적발됐다.

이 밖에도 △국내 업체 내부에 조력자 확보 △협력 업체에 접근해 납품 샘플 요구 △리서치 업체를 통해 반공개적 정보 수집 △산학 협력을 명목으로 기업 자료 요청 등의 수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중국의 한 기업이 국내 리서치 업체에 거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급하고 국내 대기업의 핵심 제품 생산과정 노하우를 수집해달라고 의뢰한 사건도 있었다. 이 리서치 업체는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리 기업의 비공개 정보를 입수한 후 이를 경쟁국 기업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통상적인 용역 비용의 5~10배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한 극히 이례적인 일로, 이 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소요 기간이 최소 3년 이상 필요한 대규모 프로젝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中, 한국 소부장 기술 정조준

아울러 서울경제의 취재 결과 중국은 최근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소재·부품·장비와 관련해 우리 기술과 인력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도체 미세 공정을 위한 소재나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인력을 암암리에 국내에서 모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반도체 업계의 채용 사이트에는 중국의 특정 업체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연구개발 경력직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빛으로 회로 모양을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노광 공정을 할 때 동그란 웨이퍼 위에 균일하게 도포해야 하는 액체로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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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채용 공고에는 불화크립톤(KrF), 불화아르곤(ArF)용 포토레지스트는 물론 첨단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극자외선(EUV)용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개발 경력자 모집도 명시돼 있다. 아직 중국에서 도입조차 되지 않은 EUV 공정용 포토레지스트 개발 인력을 뽑는 것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국 반도체 공장 연구원들 반도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中기업, 반도체 미세공정 전문가 모집

업계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최근 중국 내에서 포토레지스트 개발 인력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있는 회사는 중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제조 업체인 ‘시네바(Sineva)’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첨단 5㎚(나노미터, 10억 분의 1m) 반도체 생산 경력이 있는 한국과 소재 강국인 일본에서 근무하는 포토레지스트 전문가를 끌어들여 새로운 조직을 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당 채용 공고 역시 시네바에서 헤드헌터 업체를 통해 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시네바는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의 자회사다. 중국 BOE는 2000년대 초 국내 기업인 하이디스를 인수한 뒤 기술을 빼내 내재화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글로벌 1위 디스플레이 업체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BOE의 자회사인 시네바가 디스플레이 장비 부문을 넘어 첨단산업의 뿌리인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세세한 영역까지 접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소재 장비 업체가 포토레지스트 성능 개발을 넘어 한국처럼 체계적인 공급망 관리와 품질 관리 노하우를 습득하기 위해 국내 대기업 직원들과 전문가들을 호시탐탐 탐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21조 4,474억 원.’

지난 2016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우리 주요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려다 국가정보원 등에 적발된 사례는 111건에 달한다. 최근 5년여간의 기술 유출 통계가 정확히 집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가운데 피해 규모 추산이 가능한 기술들만 따져봐도 피해 예방액이 21조 원을 넘는다. 피해 예방액은 각 기업들이 연구개발(R&D)비, 예상 매출액 등을 반영해 기술 유출 시 피해 규모를 따져본 것이다.

국정원과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따르면 5년 6개월 동안 적발된 111건에는 국가 안보 및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핵심 기술’ 유출 사건도 35건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기술은 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우리 주력 산업 분야에 집중돼 있다. 이런 분야의 기술이 실제로 경쟁국에 유출될 경우 피해 규모는 조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분야별로 보면 총 111건 가운데 반도체를 포함한 전기전자 분야 기술 유출이 41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디스플레이(17건), 조선(14건), 자동차(8건), 정보통신(8건), 기계(8건) 등이 뒤를 따랐다. 이들 업종은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미래 첨단 분야인 만큼 기술 유출을 막을 대비책을 꼼꼼하게 마련하지 않을 경우 큰 타격이 예상된다.

기업별로 보면 핵심 역량이 있는 중소기업에서 기술 유출이 상당수 일어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다. 111건 가운데 중소기업에서 적발된 사례가 무려 66건에 달한다. 이어 대기업(36건), 대학·연구소(8건), 공공 기관(1건)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하고 내부 관리가 허술한 중소기업을 타깃으로 기술 유출 시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업계 전문가는 “중소기업에서의 기술 유출이 더 심각한 이유는 하나의 기술 유출이 해당 기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017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두께 측정기 제조 업체 A사의 직원은 퇴직하면서 회사의 핵심 기술 소스 코드를 USB에 담아 유출했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의 경쟁 업체에 지원했다. 이후 중국 업체가 이 소스 코드를 활용해 저가 장비를 다량 제조·판매하면서 A사는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에 밀려 경영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술 유출 위협이 전방위로 늘어나면서 국정원과 검찰 등 우리 당국 역시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국정원은 올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검찰 첨단산업 보호 중점청인 수원지방검찰청과 산업 기술 범죄, 방위산업 침해 대응 역량 제고를 위한 간담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풍력발전 핵심 기술, 차세대 연료전지 기술, 디스플레이 기술의 해외 유출 등 최근 국정원과 검찰의 공조수사 사례들이 공유됐고 정보 교류, 해외 수사 공조를 위한 긴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한 건의 기술 유출이 국가의 미래 먹거리까지 위협할 수 있는 만큼 이들 기관에 보다 전폭적인 힘이 실리고 민관 공조 역시 더욱 치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최근 경쟁 기업에서 우리 인력을 빼돌리려고 헤드헌터들이 들어왔을 때 이를 국정원이 먼저 파악해 알려준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됐다”면서 “이 분야에서만큼은 민간 기업과 국정원·검찰 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더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의 관심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윤홍우 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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