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외 경영 환경이 악화하고 있지만 스타트업 시장의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올 상반기에만 3조 730억 원 규모의 벤처 투자가 단행됐다. 벤처 펀드도 2조 7,433억 원이 새로 결성됐다. 모두 역대 최대 규모다. ‘제2벤처붐’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할 정도다.
풍부한 시장 유동자금에다 코로나19로 비대면 분야 신산업이 주목받으면서 성장 기대감이 커진 스타트업계에서는 혁신에 가속도를 높이고 있다. 쿠팡의 미국 증시 상장, 배달의민족·하이퍼커넥트의 대규모 인수합병(M&A), 야놀자의 비전펀드 투자 유치 등 눈에 띄는 성과가 속속 이어지면서 벤처기업의 성장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경제를 이끄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제2의 벤처붐 열기가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 지금을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다. 벤처기업으로 이목이 쏠린 요즘 ‘벤처붐’이 탄력을 받을 수 있는 지원책과 지속 가능한 벤처 생태계 구축을 위한 계획이 가장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7만여 벤처기업을 대표하는 벤처기업협회의 강삼권(사진) 회장에게서 벤처기업의 역량과 성과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전략과 비전을 들어봤다. /대담=홍병문 성장기업부장 hbm@sedaily.com
“한국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사)의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내수 기업이 상당수입니다. ‘제2벤처붐’이 계속되려면 벤처·스타트업이 국내시장의 한계를 벗어나 해외 진출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벤처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규제를 하루빨리 벗겨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앞서나갈 수 있습니다.”
제10대 벤처기업협회장으로 취임한 지 반년을 맞는 강 회장은 1일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제2벤처붐’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산업용 모바일 기기 제조 기업인 포인트모바일 대표이기도 한 그는 “정부의 모태펀드를 중심으로 벤처 투자는 사상 최고로 활성화됐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다만 창업 유도와 초기 투자 이후 벤처·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위한 규모 있는 투자를 위해서는 민간 투자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투자, 창업 성장, 회수, 재투자로 이어지는 민간 중심의 선순환 벤처 투자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민간 자본의 유입을 위한 추가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엇보다 혁신 벤처의 새로운 시도를 막는 ‘규제’를 ‘제2벤처붐’의 최대 걸림돌로 꼽았다. 시장에 배타적인 규제로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는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게 강 회장의 진단이다. 실제 벤처기업협회장으로 지난 2월 정부로부터 이양받은 벤처기업확인제를 운영하다 경직된 행정 규제를 맞닥뜨렸다. 정보 보안 탓에 협회 각 지역 지회별 벤처기업의 구체적인 데이터를 협회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던 것이다. 이 제도는 협회가 꾸린 위원회에서 기술력과 혁신성을 평가하면 3년의 유효기간 동안 벤처기업이 각종 세제 혜택과 정책 자금 우대를 받도록 한 것이다. 벤처 인증의 유효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평가지표를 현실에 맞게 신설했다.
그는 “제도 운영에 필요한 벤처 인증 관련 데이터를 요청했지만 뒷받침할 근거가 없어 실무진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대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내 벤처기업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데이터를 공유하면서 규제가 완화된 아이러니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산업과 신산업 간 갈등에 대해서도 정부에 과감한 규제 개혁을 촉구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3년 전 ‘타다 사태’에 이어 최근 변호사 단체와 ‘로톡’의 헌법 소원 등 법조·세무·의료·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방이 반복 확산하고 있다. 강 회장은 “새로운 비즈니스가 창출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과 제도의 틀로 신산업을 재단해서는 안 되며 속도감 있는 규제 혁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기업 활동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겨야 하며 기업 간 공정한 경쟁과 협력을 통해 민간에서 자율적인 규제가 형성되고 자정작용이 이뤄지는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규제의 ‘일몰제’를 적극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생활 환경이나 산업 체계가 빠른 속도로 변함에 따라 이를 기반한 법도 일정 시간이 되면 반드시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규제와 기득권 보호만을 위한 항목은 솎아내고 필요한 내용을 추가하는 방식이다. 강 회장은 “의약품 배달, 온라인 판매 서비스의 경우 1960년대 약 보따리상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50년 전 법 조항 때문에 시장 자체의 발이 묶여버린 사례”라면서 “특별법이 5~10년 단위로 갱신을 검토하는 것처럼 신생 산업에 대한 새로운 규제는 물론 기존 산업계의 기반이 되는 규제도 일몰제를 적용해 유연하게 현실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개인정보보호법만 글로벌 수준에 맞춰 어느 정도 완화해도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창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협회는 가장 시급한 규제 완화 분야를 ‘원격의료’로 보고 올해 안에 규제 완화를 위한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강 회장은 “한국은 우수한 의료 인프라와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가 합쳐져 원격의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가 될 수 있지만 규제로 인해 창업과 서비스 영역이 제한적이어서 글로벌 약 40조 원 규모의 시장을 놓치고 있는 상황”이라며 “코로나19 사태로 한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에서 비대면 진료, 의약품 배달 등이 가속화하고 필요성과 효용성이 입증되고 있어 시급히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규제 완화는 신산업 육성뿐 아니라 공정 경제를 구축하는 데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혁신을 제안하는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기득권 사업자에 유리한 룰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지난달 15일부터 시행된 ‘조달청 평가위원 통합 관리 규정’ 제정만 해도 평가 시스템을 개편해 공정성을 높인 사례다. 조달청에 납품 제품이나 용역을 평가하는 심사단을 3만 명까지 확대해 로비나 유착 가능성을 차단한 방식이다. 강 회장은 “정부는 공방을 벌이고 있는 산업계를 중재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산업 생태계 발전의 취지에서 제도 개선에 적극적인 자세가 필수”라고 말했다.
협회는 앞으로 스타트업·유니콘을 비롯해 스케일업 단계의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으로도 활동 범위를 확대한다. 1995년 설립 이후 어느새 25년이 훌쩍 넘은 협회 역사만큼 외형 규모로는 창업부터 중소·중견·대기업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혁신을 지원하기만 하면 됐다면 이제는 벤처기업이 오래 활동하도록 세분화된 목소리를 정책으로 만들어야 할 단계다.
강 회장은 “국내 중소기업은 60%가량이 대기업과 하청 관계로 사업을 하면서 성장에 한계를 겪고는 했다”며 “하지만 일본·대만만 해도 연 매출 1조 원 규모의 중견 회사로 성장한 벤처기업이 많은 것처럼 미들급 산업 생태계가 탄탄해지도록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벤처기업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현실을 반영한 승계지원법 개선, 오픈이노베이션 생태계 조성, 불공정거래집단신고제 도입 등 정책 제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벤처기업의 양적 성장만이 아닌 질적 성장을 위해서 강 회장은 “벤처기업의 탄력적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최대 1년으로 확대해야 한다”면서 “선택적 근로시간 도입의 연구개발(R&D) 한정 폐지 등도 촉구한다”고 말했다. 스케일업을 위한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중소기업 대주주 주식에 대한 양도세율 조정도 언급했다.
강 회장은 “국내 벤처 생태계의 난제 중 하나인 M&A를 통한 회수 시장 조성을 위해 정부가 많은 활성화 대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양도세율 상향은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며 “국내 M&A 시장이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 양도세율을 완화하고 스케일업을 위해 다양한 민간 자본이 움직이는 벤처 생태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협회는 규제 컨트롤타워를 만들어달라고 정부에 꾸준히 요청하고 있다. 강 회장은 “국무조정실의 규재 샌드박스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부처에 걸친 규제나 정책으로 인해 속도감 있게 통제되지 못한다”며 “각 부처에서 단순 의견만 수집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벤처·스타트업 육성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는 내년 대통령 선거 후보군에도 혁신적인 규제 개선을 당부했다. 강 회장은 “기업가 정신이 충만하고 혁신 국가 실현을 위해 범국가·사회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대원칙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구체적 제도와 규제 개선 이슈와 더불어 국가 혁신 시스템 구축을 위한 거시적 어젠다와 실천 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정책 대안이 제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리=이재명 기자 nowlight@sedaily.com 사진=오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