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방학을 맞은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온라인 강의실에 모였다. 고전을 책과 영화로 해석하는 특별한 강좌가 열렸기 때문이다. 종로도서관이 지역 청소년의 인문학 사고를 높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강의를 맡은 영화평론가 최은씨는 제인 오스틴(1775~1817년)의 소설 ‘오만과 편견(1813)’을 존 라이트 감독의 영화 ‘오만과 편견(2005)’으로 보며 해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 평론가는 “제인 오스틴은 생전에 총 6편의 장편소설과 1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는데 주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며 “오스틴의 작품들은 전쟁 등으로 혼란했던 당시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야기라며 비난을 받았었다”고 말했다. 최 평론가는 “현대에 와서 오스틴의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며 “오스틴의 모든 작품이 수차례에 걸쳐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오스틴에 대한 존경심으로 영국에서는 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해 10파운드 지폐에 오스틴의 초상화를 넣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오스틴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 즉 반어법을 우아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오스틴의 반어적 표현을 잘 담고 있어 유명한 ‘오만과 편견’의 첫 구절을 학생들에게 읽어줬다.
‘재산 꽤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너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최 평론가는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여성들 앞에서 우쭐대는 남성들에게 오스틴은 ‘당신들은 단지 돈으로 취급받는 건데 좋아할 일이 아니다’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며 첫 구절에 담긴 반어적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오만과 편견’에서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여성의 삶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영화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영화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남자들의 청혼을 당당히 거절한다. 그러나 재산이 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언니와 친구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속물 같다고 비난하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최 평론가는 “엘리자베스의 이 같은 모습이 오스틴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이 소설을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기에 오스틴은 변변한 작업공간도 없이 거실의 조그만 탁자에서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당차게 이어갔다”며 “소설에서 그는 우아한 문체로 불합리한 관습과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처럼 주관을 갖고 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기보다 위로하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점이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스틴의 작품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강의를 마치며 최 평론가는 “사회의 격변기에 사랑이야기를 쓴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오스틴의 소설은 현대인들에게 그 시대를 이해하는 눈을 갖게 해 줬다”며 “자주 본 소설이나 영화도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조언했다.
종로도서관이 마련한 최 평론가의 ‘원작과 함께 영화읽기’ 강좌는 ‘고인돌2.0(고전·인문아카데미2.0: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최됐다. ‘고인돌2.0’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과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 2013년부터 함께한 인문학 교육 사업이다. 성인 중심의 인문학 강좌로 시작한 ‘고인돌’은 지난해부터 명칭을 ‘고인돌2.0’으로 바꾸고 서울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총 56개 강좌로 구성된 올해 제9기 ‘고인돌2.0’은 특히 교과목과의 연계성을 높여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강의에 참여한 배화여고 2학년 이어진 양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담긴 당시 약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에 대해 알게 됐다”며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과 제도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하게 만든 강의였다”고 말했다.
서진숙 배화여고 국어 교사는 “영화를 통해 고전을 해석하며 학생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 유익한 강의였다”며 “여성으로서 나 자신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자리가 됐다”고 말했다.
고인돌 2.0은 올 11월까지 80여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들의 인문학의 사고를 높이기 위한 강연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 이효정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원 hj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