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년 전 제주 북동쪽에서 작은 화산 폭발이 수 차례 일어났다. 분화구에서 분출된 용암은 지표면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내려 제주 북동쪽 해안선에 다다라서야 서서히 굳어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동굴이 만들어졌고 주변은 숲으로 뒤덮였다. 거문오름과 용암 동굴계는 이렇게 형성됐다.
거문오름은 ‘오름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제주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만장굴과 김녕굴·벵뒤굴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희귀한 20여 개의 용암 동굴계를 품고 있고 원시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거문오름과 용암 동굴계는 그 규모와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자연유산 등재 이후 거문오름은 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하루 출입 인원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8개의 동굴 가운데 만장굴 일부 구간을 제외한 7개 동굴에는 일반의 출입이 아예 금지됐다.
그렇게 베일에 가려졌던 거문오름과 동굴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세계유산축전 사무국이 오는 10월 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축전 기간 워킹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자연유산을 일반에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훼손에 대한 우려에도 그 가치를 알리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일반 공개에 앞서 세계유산축전 사무국 직원의 동행하에 비공개 구간 중 일부를 미리 둘러봤다.
워킹투어는 만 년 전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흘렀던 흔적을 그대로 따라 걷는 과정이다. 용암이 시작된 거문오름에서부터 용암이 식어 굳어버린 월정리 해변까지를 복원한 총 26.5㎞의 트레킹 코스, 일병 ‘불의 숨길’ 구간이다. ‘시원의 길(5.5㎞)’ ‘용암의 길(4.8㎞)’ ‘동굴의 길(8.9㎞)’ ‘돌과 새 생명의 길(6.9㎞)’이라고 이름 붙은 4개 구간으로 이뤄진 길을 따라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화산섬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출발 지점인 제주 조천읍 선흘리 거문오름은 용암 동굴계의 모태다. 총 20여 개에 달하는 용암 동굴 구조를 완성시킨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삼나무 숲을 통과해 멍석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산 능선길로 이어진다. 주변은 온통 화산섬의 생태 보고인 곶자왈이다. 제주 사투리인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자갈을 의미하는 ‘자왈’의 합성어로 나무와 덩굴이 마구 엉클어진 덤불을 일컫는다. 이끼로 가득한 돌덩이를 감싼 나무 뿌리가 지표면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말굽 형태의 거문오름은 해발 457m에 달하는 작은 산봉우리인데 전망대에 오르면 가운데가 움푹 패인 분석구와 다양한 화산 형태를 만나볼 수 있다. 용암은 땅 속으로 흘러들어 동굴을, 지표면 위에는 협곡을 만들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주변의 수많은 오름 사이로 용암이 지나간 흔적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주둔지였다는 오름 주변에는 참호, 주둔지 등 군사 시설 일부가 남아 있고 화전민들의 흔적인 숯가마터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거문오름의 진가는 주변 생태계에 있다. 붉은박쥐·붓순나무·으름난초 등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적인 멸종 위기 동식물이 서식하며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림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1구간은 오름 아래에서 출발해 정상에 올랐다가 주변을 한 바퀴 도는 3시간짜리 코스다. 코스 대부분이 기존의 거문오름 방문객들의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거문오름 자체는 평소에도 일반에 개방되지만 사전 예약을 통해 해설사와 동반해 이동해야 하고 하루 입장 인원도 225명으로 제한된다.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은 대부분 땅 밑에 숨겨져 있다. ‘불의 숨길’의 하이라이트 역시 땅 속 동굴이다. 거문오름에서 출발한 용암은 14㎞를 흐르면서 총 20여 개의 동굴을 남겼다. 이 가운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동굴은 벵뒤굴·웃산전굴·북오름굴·대림굴·만장굴·김녕굴·용천동굴·당처물동굴 8곳이다. 평소에는 만장굴의 일부 구간에만 발을 디딜 수 있지만 이번 축전 기간에는 만장굴 비공개 구간을 포함해 6개 동굴을 만나볼 수 있다.
‘불의 숨길’ 2~4구간은 벵뒤굴에서 당처물동굴까지 동굴과 동굴을 연결하는 코스다. 벵뒤굴은 거문오름이 만든 첫 번째 동굴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로형 동굴이다. 길이는 총 4,481m에 달한다. 이 때문에 4·3 사건 당시에는 인근 주민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석주는 물론 동굴광장·석순·용암교 등 용암 동굴의 다양한 특성을 모두 지닌 벵뒤굴은 아직 발굴 조사가 끝나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다. 최근 드라마 ‘킹덤: 아신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되면서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벵뒤굴과 연결되는 웃산전굴은 초대형 동굴이다. 웃산전은 제주 말로 ‘산의 밭’이라는 의미인데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넓은 입구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동굴이 무너지고 남은 구간은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 용암교라고 불린다. 마치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놓인 돌다리 같은 모양이다. 동굴 안쪽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지층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동굴 속 기온은 평균 섭씨 15도. 입구 근처에만 가도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벵뒤굴과 웃산전굴은 불의 숨길 2구간에서 만나볼 수 있다.
관광객들에게 친숙한 만장굴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동굴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에 개방돼 있다. 전체 7.4㎞ 중 1㎞ 구간뿐이지만 말이다. 축전 기간 중에는 나머지 미공개 구간도 공개된다. ‘불의 숨길’ 후반부인 이곳부터는 용암이 시간 차를 두고 서서히 식어가면서 생긴 밧줄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장애물에 막혀 용암이 고이면서 층층이 식어간 흔적이다. 뱀굴·사굴이라고도 불리는 김녕굴은 구불구불한 형태 때문에 큰 구렁이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른 동굴들과는 달리 용암 동굴과 석회동굴의 형태가 뒤섞인 김녕굴은 인근 바다에서 날아온 모래와 함께 조개껍질 가루, 산호 가루가 쌓여 바닥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코스가 끝나는 지점은 월정리 해변이다. 용암이 지표면 밖에서 바닷물을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해안가에 검은색 용암대지를 만들었다.
축전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개방되는 트레킹 코스에는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해 각 구간 별로 회당 20명씩만 참여할 수 있고 사전에 교육도 이수해야 한다. 불의 숨길은 워킹투어 외에도 한라산부터 거문오름 용암 동굴계, 성산일출봉까지 전 구간을 걷는 ‘순례단’과 불의 숨길 중 중요 구간을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체험하는 ‘탐험버스’, 만장굴 전 구간과 벵뒤굴, 만장굴&김녕굴을 집중 탐험하는 ‘특별탐험대’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세계유산축전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