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 개성 있는 마스크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작은 체구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진다. 신기루 같은 소설 속 인물도 심달기를 만나면 진짜 있는 것처럼 살아난다.
1일 개봉한 영화 ‘최선의 삶’은 불안하고 예민한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 강이(방민아), 아람(심달기), 소영(한성민)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출을 감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아람은 결핍이 많은 아이다. 자신처럼 버려진 것들에 대해 연민을 갖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말들을 툭툭 내뱉는다. 길거리에서 만난 오빠가 자신을 폭행해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술집에서 만난 손님들도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거라며 기뻐한다.
심달기는 세 주인공 중 가장 먼저 캐스팅됐다. 단편 영화들을 통해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이우정 감독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하며 심달기를 떠올렸고, 아람 역을 제안하며 처음 만났다. 심달기는 이 감독이 이미 자신을 간파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신기했다.
“처음에 아람 캐릭터를 시나리오로만 봤을 때는 ‘왜 나를 아람이로 떠올렸지?’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아람이 모든 순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쭉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감독님과 말씀을 나누고 소설을 읽다 보니 아람과 제가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감독님이 다른 작품을 통해 저도 모르는 저의 면을 보신 것 같아요. 저의 과거 행동 방식 같은 것들이 아람과 너무 닮아있어서 많이 놀랐어요. 저는 아람이가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아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랬구나’라는 충격도 있었죠.”
초기 시나리오는 영화 버전과 많이 달랐다. 밀도 있는 이야기이다 보니, 원작을 읽지 않고서는 완벽하게 감정선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원작을 읽으면서 시나리오의 감정선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이렇게 착하지 않게 끝까지 가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 같아 반가웠다.
“제일 알쏭달쏭한 인물이 아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저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다행히도 제가 아람이와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람이와는 다른 이유였지만, 저도 어렸을 때 무언가 버려진 물건에 대해 애착이 컸거든요. 처음에는 아람이가 이것저것 주워오는 이유가 버려진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연민이라기보다 일종의 도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무감각해지는 인물이에요. 한편으로는 너무 아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인물이고요. 그래서 자신보다 더 아픈 존재를 찾아다니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심달기는 아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연기를 하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아람의 배경이 직접적으로 설명되는 장면이나, 감정에 대해 소회하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람이 온몸으로 고통을 표현하는 인물이 아니어서, 스크린 속에 내면의 아픔이 묻어 나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살고 있는 아람을 내가 감히 연기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죄책감까지도 들었다.
“아람이가 험한 꼴을 당하고 와서도 미련해 보일 정도로 헤헤 웃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만 보여서는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갑자기 눈물을 흘려야 하는 순간도 있었죠. 그래서 제가 계획했던 것들과는 다르게 연기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감독님을 믿고 따랐어요. 그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최선의 삶’의 시대적 배경은 2003년 대전이다. 심달기는 그때 당시 유행했던 큰 링 귀걸이나 화려한 프린팅이 있는 티셔츠 등으로 시대상을 표현했다. 의상팀에서 빈티지 쇼핑몰이나 동묘시장을 뒤지며 의상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심달기는 손수 아람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찾아오는 열정을 보였다.
“2000년대 초반 스타일링들이나 느낌은 감독님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여주셔서 참고했어요. 이외 여러 가지 자료들은 방민아, 한성민과 많이 공유했고요. 원래 소설 속의 아람은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짧게 자르기도 하고 다양한 스타일링을 해요. 저도 그걸 많이 기대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할 수 없었어요. 대신 부스스한 곱슬머리로 스타일링 했는데 감독님이 원하신 거였어요.”(웃음)
방민아, 한성민과의 촬영은 실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학교 근처에서 몰래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치면서 놀면서 학교 친구처럼 지냈다. 현실에서도 삼총사가 된 이들은 각자 캐릭터의 의상을 맞고 모임을 하기도 했다.
“셋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때, 제가 힘든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방)민아 언니는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그 힘듦의 종류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어서, 제가 조금만 이야기해도 바로 무슨 이야기인지 척 알아듣고 새로운 이야기를 해줬어요. ‘이렇게 말이 잘 통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어요.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죠.”
심달기에게 ‘최선의 삶’은 다시없을 기회이자, 아쉬움이 가득한 영화다. 아람에게 미안하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그러지 못한 것 같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되짚었다. 어느 작품에서든 아쉬움을 느끼긴 하지만, 특히 아람에 대한 여운은 계속 남아있다.
“제가 그동안 맡은 역할들과 어떤 차별점을 둬야 하나 고민했어요. 저를 쭉 지켜봐온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분들이 기시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죠. 그런 마음을 들킬까 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섬뜩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지나온 시기이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금방 잊게 되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게 되잖아요. 실제로 그 속에서는 고통스러웠다는 걸 일깨워줬으면 좋겠어요. 보통 청소년들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판타지가 많은 것 같은데, ‘최선의 삶’에는 판타지가 없거든요. 그래서 더 특별한 영화예요.”
심달기는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배우. 그는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을 통해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으며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엉뚱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소설 속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한 그는 크고 작은 역할을 맡으며 배우로서 아우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저의 학창 시절은 진짜 아람과 비슷했어요. 관객들이 아람을 보면 ‘어쩜 그렇게 항상 하이텐션이지?’라고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원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었죠. 그런데 실제로 제가 어릴 적에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텐션이 지속됐어요. 아직도 체내에 가둬진 에너지가 많아서 그런지 역동적인 것들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액션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에너지 강한 배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