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오색인문학] 국수만 파는 맛집엔 '포기의 선택'이 없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황금국수를 추억하며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뙤약볕 내리꽂는 여름날 정오에는 점심 식사로 시원한 냉면이 어울리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매콤한 비빔국수도 가히 일품이다. 집 근처에 아내와 자주 가던 식당이 있었다. 무척 허름한 곳인데다가 달랑 국수 하나만 팔고 식당 이름이 유치하게도 ‘황금 국수’다. 그런데 그 집 국수를 먹고 나면 생각이 단박에 바뀐다. 황금을 줘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맛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내 미각 기준에 따르면, 국수의 맛은 면발이 첫째요, 육수가 다음이고, 양념이 마지막이다. 그 집 국수는 이 세 가지 맛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기에, 면발이 황금빛으로 빛날 때가 많았다. 국수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아내조차 이 집 국수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안타깝게도 그 국숫집이 문을 닫은 지가 꽤 되었다. 그렇게 빼어난 맛집도 국수를 즐기지 않는(대신 스파게티를 즐기는)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외면 당한 모양이다.

소위 맛집이라 불리는 곳은 대개 메뉴의 가짓수가 적다. 앞서 말한 국숫집처럼 한 가지 음식만 파는 맛집이 많다. 심지어 식재료까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가령 된장찌개 하나를 끓일 때 들어가는 재료가 몇 가지 안 된다. 그럼에도 국물 맛이 하염없는 깊이를 뽐낸다. 사실 한식에서 빠트릴 수 없는 김치 한 조각만으로도 그 집의 음식 솜씨는 금세 확인된다.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과 한 두 가지 만으로도 맛집이 될 수 있다.

탁월한 맛 이외에도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나는 맛집을 선호한다. 그곳에서는 짐작도 안 되는 이상한 이름들의 수많은 옵션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통상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유의 폭이 넓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예컨대 전근대 사회처럼 가업을 이어받는 것 외에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거의 없었던 적을 떠올려 보라. 부모가 농부면 자식도 농부여야 하고 부모가 장사치면 자식도 그래야만 했던 시절에는 선택지가 많은 것이 자유의 신장을 뜻했다.



지금은 모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원칙적으로만 그렇다는 말이다. 제도적으로 선택의 가능성은 열어 두지만, 직업이 요구하는 능력검정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동일한 욕망을 가진 숱한 이들과 경쟁해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 법적으로 어떤 직업도 선택할 수 있고,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선택의 번민에 휩싸이지만, 현실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극소수다. 대기업 임원 정도의 연봉을 원한다면, 우리는 몇 안 되는 그 자리를 위해서 수천 명과 경쟁해야 한다.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자가 된다. 루저를 양산하는 승자 독식 줄 세우기 구조에서는 선택지가 많은 것이 도리어 기만적 자유처럼 느껴진다. 한껏 부풀려진 환상을 터트리는 환멸의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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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가 많다는 것은 기실 어떤 메뉴도 맛에 자신 없어서, 그 부재를 감추기 위한 위장일 수 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간의 판단력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빛의 속도로 일하는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 장애로 고생하는 소비자를 안심케 하려고, 수많은 선택지를 모험하는 소비자라는 환상이 고안되기도 한다. 소비자는 광활한 선택지를 가진 ‘왕’이자 미지의 땅을 하나하나 섭렵해가는 ‘모험가’다. 새로운 맛을 차례차례 정복하는 식도락가가 등장하는 소위 ‘먹방’이 그런 환상의 제조 공장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실은 포기한다는 뜻이다. 선택 못한 모든 가능성들의 포기를 감수하면서 선택한 하나에 만족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무언가를 선택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선택지에 포박당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선택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 같지만, 주어진 메뉴판에 갇힌 꼴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커피 전문점에서 당귀차를,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비빔국수를 주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선택은 ‘선택 당한 선택’이다. 전통찻집과 국숫집이 없는 특정 시대에 우리는 갇혀있다.

영어 ‘choose’의 어원적 의미는 ‘맛보다(taste)’라고 한다. 태초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선택은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맛보는 행위였을 것이다. 문명 사회에서 미식가는 발품을 들여 애써 맛집을 찾는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심신의 고양을 위해서다. 맛있게 삼킨 타자가 나의 일부가 되면서, 존재의 질적 고양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맛은 멋의 디딤돌이다. 그런데 맛집은 드물고 대개 숨어 있어서 내가 맛집을 선택한다기보다 운 좋게 선택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미식가는 황금국수 같은 탁월한 음식에만 선택되는 길을 취한다. 그래야 겨우 존재의 허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맛집이 점차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선택(당)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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