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겹겹 한지에 스민 전통무속의 축원

설치미술가 양혜규 신작 '황홀망'

국제갤러리 K1서 세계 최초 공개

무속도구 제작기법의 한지작업

양혜규의 '일렁이는 횃불분수도(島)-황홀망 #16' /사진제공=국제갤러리양혜규의 '일렁이는 횃불분수도(島)-황홀망 #16'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찬란한 ‘황홀’에 그물 ‘망(網)’자를 쓴 ‘황홀망’이다. 얇은 한지가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로, 때로는 겹겹이 포개져 신비로운 형상으로 펼쳐진다. 어딘지 모르게 서러우나 더없이 화려하고, 여리지만 위엄 있다. 유약한 재료에서 강력한 축원의 기운이 뿜어 나온다.



현대미술가 양혜규의 최신작 ‘황홀망’ 연작 12점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K1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양혜규 개인전 'O2 & H2O'에서 선보인 '오행비행' 전시 전경. /서울경제DB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양혜규 개인전 'O2 & H2O'에서 선보인 '오행비행' 전시 전경. /서울경제DB


작가 양혜규는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MMCA현대차시리즈 개인전 ‘O2 & H2O’에서 대형 현수막 5점을 각각 풍선에 매달아 띄운 ‘오행비행’을 선보였다. 우리 전통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5가지 기본요소라 칭하는 물·나무·불·흙·쇠의 오행(五行)을 내용으로 한 작품인데, 현수막 양 옆과 아래로 얇은 여러 겹 종이 장식이 술 혹은 그물처럼 달려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냈다. 종이작업 ‘황홀망’은 여기서 시작됐다.

양혜규 '채송화 수축진-황홀망 #29' /사진제공=국제갤러리양혜규 '채송화 수축진-황홀망 #29'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작품의 탄생 이전에는 조사와 연구 과정이 있었다. ‘황홀망’의 근간에는 일명 ‘까수기’라고도 불리는 ‘설위설경(設位設經)’이 있다. 종이를 여러 번 접어 오린 후 다시 펼쳐 굿에 쓰기 위해 만드는 무속도구 제작법이다. 이런 종이 ‘까수기’를 통해 굿할 때 쓰는 ‘고깔’, 잡귀를 가두는 ‘철망’, 공간을 장식하는 사슬 형태의 ‘말문금쇄전’을 만들고, 망자의 영혼을 상징화 한 ‘넋전’이나 흰 종이로 만들어 서리를 닮은 꽃 ‘서리화’를 만들기도 했다. 작가는 “종이라는 미미한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는 영(靈)적인 행위”에 주목했다.

양혜규의 '장파 충천 넋전-황홀망 #5' /사진제공=국제갤러리양혜규의 '장파 충천 넋전-황홀망 #5'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양혜규의 대표 아이콘은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을 당시에도 선보인 ‘블라인드 설치작업’. 얇은 면이 겹겹이 놓여 공간을 이루고, 안팎과 앞뒤가 모호하며, 덮었으나 가리지 않는 반투명의 독특한 속성은 블라인드에서부터 이번 한지작업까지 같은 맥락을 이룬다. 납작한 평면임에도 포개진 한지에서 아득한 깊이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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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 개인전 때 보여준 ‘짚풀’ 작업, 지난 2019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며 공개된 ‘방울’ 작업 등에서 이어온 무속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다. 소외된 무속신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이번 ‘황홀망’의 제작기법은 중국의 전지공예, 일본의 키리가미를 비롯한 멕시코·필리핀·인도, 유대인과 슬라브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이공예라는 점에서 보편성도 갖는다. 서양인의 눈에는 앙리 마티스의 색종이 드로잉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양혜규의 '행성계 신호진-황홀망 #31' /사진제공=국제갤러리양혜규의 '행성계 신호진-황홀망 #31'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양혜규가 대형 설치작업으로 명성 높지만 평면작업에 대한 꾸준한 고집이 있다. 채소 담던 그물망이나 커터칼의 버려진 칼날 등을 나무판에 부착한 ‘래커(lacquer) 회화’는 1994년부터 시작했고, 은행이나 카드사에서 개인정보를 담아 보내는 편지봉투의 보안 무늬를 소재로 만든 ‘신용양호자’ 연작이나 채소·향신료를 재료로 한 판화 작업은 10년 이상 지속했다. 일상 속 소소한 재료, 무심코 지나칠 힘없는 것들을 작품에 기발하게 담아내는 것은 양 작가의 특기다.

양혜규의 '낙하하는 해오름-황홀망 #11' /사진제공=국제갤러리양혜규의 '낙하하는 해오름-황홀망 #11' /사진제공=국제갤러리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작업하는 양혜규는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13 등 저명한 국제행사를 두루 휩쓸었다.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했고, 유수의 기관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2018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독일의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수상했고 현재는 모교인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순수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국의 저명한 현대미술 전문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미술계 영향력 ‘파워 100인’에서 한국인 최고 순위인 36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가장 국제적인 미술가 중 하나다.

전시를 열 때 최소 90점 이상의 작품을 내놓는 작가인지라 이번 소규모 작품 공개는 ‘쇼케이스’임을 강조했다. 오는 12일까지 K1에서 선보이고, 이후 15일부터는 국제갤러리의 새 공간 ‘리졸리 스튜디오’로 장소를 옮긴다.

국제갤러리 K1에서 오는 12일까지 열리는 양혜규의 신작 쇼케이스 '황홀망' 전경. /사진제공=국제갤러리국제갤러리 K1에서 오는 12일까지 열리는 양혜규의 신작 쇼케이스 '황홀망' 전경. /사진제공=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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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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