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관은 대통령의 변호사가 아니라 국민의 변호사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메릭 갈런드가 지난 2월 인사 청문회에서 비장하게 각오를 밝혔다. 그는 취임사에서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친구와 적, 힘 있는 사람과 힘 없는 사람, 부자와 빈자, 인종과 민족에 따라 법규가 다르게 적용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검찰총장을 겸하지만 정치 관련 수사엔 개입하지 않는다.
무대를 문재인 정부로 옮기면 딴판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더불어민주당 현역 의원이다.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에서 여당 의원이 법무장관을 맡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박 장관은 올 초 “장관으로 일하지만 기본적으로 (여당) 국회의원”이라며 당파성을 드러냈다. 박 장관은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최근 국회에서 “손준성 검사가 고발장을 보낸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겠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핵심적 수사 대상”이라는 단정적 표현도 썼다. 수사 착수 단계인데도 기정사실로 규정하며 말을 쏟아낸 것이다. 권력 비리 의혹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다.
박지원 국정원장도 닮은꼴이다. 박 원장은 고발 사주 의혹을 제보한 조성은 씨와 수차례 만나고 통화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박 원장은 고발 사주 의혹 보도 직전인 8월 11일 호텔 최고급 식당에서 조 씨와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야당은 “박 원장이 조 씨에게 제보를 사주하지 않았느냐”며 정치 공작 의혹을 제기했지만 박 원장 측은 “그런 얘기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남북 통신선을 끊은 다음 날 만나 사적인 대화만 했다면 누가 그대로 믿겠는가. 박 원장은 윤 전 총장을 겨냥해 “잠자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력 대선 주자를 협박하는 듯한 발언은 국정원의 정치 불개입 원칙에 위배된다. 미국 정보기관장의 동선이 철저히 보안에 부쳐지는 것과 비교하면 박 원장의 움직임이 조 씨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수시로 노출된 것은 어이 없는 일이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도 중립성 위배를 놓고 메달 경쟁을 하는 것 같다. 권력 수사에 미적거려온 공수처가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서는 군사작전 치르듯이 서두르고 있다. 범죄 혐의도 포착하지 못한 채 윤 전 총장을 4개 혐의 피의자로 입건하고 참고인인 김웅 의원의 사무실을 무리하게 압수수색했다. 공수처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얘기”라고 둘러댄 것도 황당하다. 공수처가 이 사건을 여당 의원 보좌관 출신인 김숙정 검사에게 배당한 것도 속 보이는 처사다.
이러니 “대선 주자 한 사람 잡기 위해 권력기관들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선거 중립 훼손 논란은 이미 내각 인사에서 예고됐다. 18개 부처 장관 중 현역 의원은 박 장관 외에도 유은혜 교육부 장관,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이인영(통일)·황희(문체)·한정애(환경)·권칠승(중기) 장관 등 7명에 이른다. 김부겸 총리는 여당 의원을 지냈다. 특히 선거 관련 업무를 맡는 검찰과 경찰을 각각 지휘하는 법무부 장관과 행안부 장관을 여당 의원이 맡게 되면 불공정 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권은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과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드루킹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기 때문에 일부에선 현 정권을 ‘드루킹 정권’이라고 조롱한다. ‘레거시(legacy·유산) 없는 정권’이란 비판을 받는 현 정부가 되레 선거 개입 논란을 일으킨다면 엄청난 부메랑을 맞게 될 것이다. 정권 불행과 국론 분열, 선거 불복을 막으려면 당장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과거 노태우 정부는 현승종 총리 중심의 ‘중립내각’을 구성했고, 김영삼 정부도 임기 말에 중립 성향 고건 총리를 임명한 적이 있다.
글로벌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공정한 선거 관리로 국론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대선 주자들도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 성장, 복지 선순환 등 미래 비전을 놓고 정책 경쟁을 할 수 있다. 나중에 ‘드루킹 정권’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