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나를 살게 하는 산소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묵묵히, 그러나 뜨겁게 걸어온 시간이었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한국의 1세대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해 온 피아노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서혜경은 오는 26일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스페셜 콘서트를 앞두고 있다. 약 2년 만의 국내 무대를 앞두고 17일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아직 더 배울 게 많은데 데뷔한 지 벌써 50년이 됐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나이가 들면서 음악에 내 인생이 묻어나는 걸 느끼는데 젊었을 때와는 다른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러시아 음악 스페셜리스트’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이번 공연에서는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선보인다. 여자경 강남심포니 여자경 상임 자휘자가 이끄는 유토피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기교 면에서 가장 난해해 ‘피아니스트의 무덤’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40여 분간 지구력과 테크닉, 예술적 상상력에 있어 연주자의 한계를 실험하는 곡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연주자 서혜경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모으는 무대다. 서혜경은 “2006년 암 투병을 하면서 1년 반 넘게 피아노를 치지 못했고, 반복되는 수술과 치료로 우울증이 왔었다”며 “그 고난을 극복하고 2010년 여성 피아니스트 최초로 발매한 것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앨범이었다”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라흐마니노프 외에도 러시아 음악가들의 작품은 서혜경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 기간 중 처음 내한한 모스크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친 바 있다. 냉전 이후 진행된 러시아와의 첫 문화예술 교류였던 이 기념비적인 공연에서 서혜경은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해 호평받았고, 이듬해 다시 한국을 찾은 모스크바필하모닉과 재회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이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서혜경은 오는 10월 16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음악회에 한국 대표로 출연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협연한다.
5세에 처음 피아노를 마주한 서혜경은 11세 데뷔한 이래 무려 50년 간 한우물을 팠다. 스무 살이던 1980년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부조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최고상(1위 없는 2위)를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20대에 찾아온 근육파열에 이어 2006년에는 유방암으로 가슴 일부를 잘라내는 시련을 맞았다. 그 커다란 역경 속에서도 절대 놓지 않은 것이 피아노였다. “생존율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느냐’를 먼저 물었죠. 그만큼 피아노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요.” 여전히 피아노를 칠 수 있음에 하루하루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건반 여제는 올 연말부터 2023년까지 시애틀과 뉴욕, 마이애미에서 연주회를 펼치며 ‘쉬지 않는 열정’을 불태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