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경제부총리가 30일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할 수 있는 ‘회색 코뿔소’ 같은 위험 요인들을 선제적으로 제거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회색 코뿔소’는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제기된 개념이다. 멀리서도 잘 보이지만 정작 방치하면 대응하기 어려운 위기를 맞게 된다는 뜻이다. 홍 부총리는 국내 가계 부채 증가와 미국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등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수사적 표현이 무색할 만큼 당국의 위기 대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아니어도 최근 수년 동안 우리 경제에는 다양한 위기 요인들이 누적돼왔다. 그 결과 여러 마리의 회색 코뿔소가 동시에 어슬렁거리는 상황이 됐다. 가계 부채만 해도 정부가 지난해 말 예고한 대로 올 1분기에 출구를 찾았다면 지금처럼 파열음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기업 부채의 경우 코로나19 이후 옥석 가리기 없이 원리금 상환을 계속 유예하며 차기 정권으로 떠넘긴 ‘빚 폭탄’이 210조 원에 이른다. 내년 1,068조 원에 달하는 국가 채무는 더 이상 ‘블랙 스완(예기치 못한 위기)’이 아닌 화약고가 됐음에도 정부는 되레 현금 살포 포퓰리즘으로 이를 키워왔다.
복합 위기 속에서 공급망 붕괴와 인플레이션이 덮치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미적거리기만 하니 기업들만 답답할 노릇이다. 우리에게 닥친 더 큰 코뿔소는 규제 사슬과 기울어진 노사 운동장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노동 개혁과 규제 혁파 과제를 방치했다. 잠재성장률이 2%로 추락하는데도 정부는 5대 구조 개혁 과제를 말한 지 2년이 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이 “한국의 고령화율이 2045년에는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경고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부가 회색 코뿔소를 걱정한다면 성장 잠재력이 내리막길을 걷는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한 뒤 제대로 된 처방전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재정으로 분식된 성장률을 내세우며 자랑할 것이 아니라 민간의 자생력을 키울 근본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위기 속에서 엉뚱한 처방을 내리거나 외면한다면 무능과 직무 유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