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고난

- 박노해





폭설이 내린 산을 오른다



척박한 비탈에서 온몸을 뒤틀어가며

치열한 균형으로 뿌리박은 나무들이

저마다 한두 가지씩은 부러져 있는데

귀격으로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 한 그루

상처 난 가지 하나 없는 명문가 출신에

훤칠한 엘리트를 닮은 듯한 나무 한 그루

하지만 나는 금세 싫증이 났다

너는 어찌 된 행운인가



너에겐 폭풍과 천둥 벼락의 시대도 없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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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겐 폭설도 눈보라의 부르짖음도 없었느냐

나는 눈길을 걸으며 굽어지고 가지 꺾인

고난의 나무들을 눈길로 쓰다듬는다

장하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너는 상처를 그대로 가져가지 마라

지난날의 고난을 그대로 가져가지 마라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마라

오늘은 오늘의 상처로 새로운 과제를 줄 테니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라는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은 마세요. 사람의 일은 사람의 일, 나무의 일은 나무의 일이니까요. 사람에게는 더러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기도 하지만 산속에서는 힘든 일이지요. 비탈에 선 나무는 평지로 옮아갈 수 없고, 귀격으로 선 나무가 비탈로 몰릴 일도 없지요. 폭풍은 폭풍대로 고통이지만 무풍은 무풍대로 고통인지도 모릅니다. 벌목꾼은 귀격을 먼저 쓰러트릴 테니까요. 그도 위안은 되지 않습니다. 분재꾼은 벼랑을 먼저 오르니까요. 오늘은 오늘의 과제를 준다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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