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gs of Freedom’
“여기, 제 명함입니다.”
2020년 S그룹 최고경영진으로 퇴임하신 H님께서 건네신 명함 앞면에 ‘Wings of Freedom, 자유의 날개’라고 씌어 있었다. 세련된 핑크로 디자인된 명함 뒷면에는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뿐이다. ‘아니, 이런 신선한 컨셉의 명함이라니!’ 새 명함에 담긴 의미가 몹시 궁금했지만, 고객 미팅에서 으레 그렇듯 공식적인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 여쭈었다.
“직함이 없으신데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친구죠, 친구!”
30여 년간의 직장생활 동안 회사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놨고 많은 조직구성원의 롤모델로 소임을 다한 분께서 자신을 ‘자유의 날개’라고 소개했다. 대기업 부사장으로 퇴임한 후 ‘경영 고문’이라는 당연한 직함을 두고 개인 명함을 만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명함을 건네 받던 짧은 순간이 유쾌한 사진 한 장처럼 마음속에 남았다.
◆ 명함에 진심인 한국 사람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뿐 아니라 지인과의 만남에서도 당연한 듯 명함을 주고받는다. 상대의 회사와 직급을 재빨리 스캔하면 대화를 이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결례를 피하려고 조심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명함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존재인 명함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면 어떨까.
“퇴직을 언제 실감하냐고요? 퇴직한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느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그동안 압박을 받았던 출근의 부담감은 없었지만,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정말 낯설었습니다.” /퇴직 후 6개월, A그룹 상무
“퇴직했다는 느낌은 뼛속까지 느껴집니다.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회사에 대한 배신감, 부끄러움, 절망감. 이런 마음이 몇 달 이상 가더라고요.” /퇴직 후 1년, S그룹 전무
“그동안 누리던 것들과 단절된 느낌이 들면서 돌발적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사람들과 점점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퇴직 후 1년 6개월, D그룹 부사장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수가 없어요. 퇴직했다고 말을 못해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기도 민망하고 부모님께도 퇴직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퇴직 후 1년, 대기업 B사 부사장
(화담,하다 고객 심층 인터뷰 결과)
시대에 따라 커리어에 대한 생각도 변화를 이뤘다. 목표한 재무자산을 확보하면 조기에 퇴직한 후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는 파이어족(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사례들도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산업화를 거치면서 평생직장을 당연하게 생각해 온 베이비부머들에게 퇴직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많은 직장인의 꿈을 이룬 ‘성공한 1%’, 대기업 임원들은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그나마 재무자산은 확보했을 테니 무슨 걱정인가’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사자들은 갑작스럽게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소속감의 박탈로 인해 상당히 오랜 기간 심리적 충격에 빠진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연구소의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그의 저서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에서 중년 이후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가장 어려운 대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꼽는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하는 일과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지위의 박탈을 정체성의 상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빛나는 과거가 새로운 인생의 방향에 발목을 잡는 격이다.
◆ 무엇을 ‘내려놓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뉴타입의 시대>와 <어떻게 나의 일을 찾을 것인가>의 저자 야마구치 슈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와 에이도스(eidos)의 개념을 변화와 당위로 가득한 현시대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코나투스는 ‘본래의 자신다운 자신으로 있으려는 힘’이다. 이에 대응하는 용어로 에이도스는 ‘자신의 외모나 지위 등의 형상’을 의미한다. 에이도스에만 치중한 자기 인식은 코나투스를 훼손해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하는데, ‘더 나은 명함’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히 퇴직 후 ‘다 내려놓았다’는 표현을 쓴다. 특히, 성공한 대기업 임원들이 퇴직 후에 잃어버린 지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다소 낮은 연봉을 감수하며 현실적인 타협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에이도스에 근거한 삶을 살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내려놓는다’의 의미는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진정한 나 자신, 코나투스’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음을 자각하는 것이어야 하며,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당면한 퇴직이 적기가 될 수 있다.
회사 명함으로 나를 소개하던 시대는 갔다. ‘퇴직 이후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 첫 단계로 ‘명함이 없을 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한 줄 만들기’를 제안하고 싶다. 새 명함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한 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이야말로 앞으로 본인이 발견할 새로운 가능성을 또 다른 현실로 만들 지름길이 될 것이다.
H님께서 명함을 건네신 순간을 다시 생각한다. 새 명함에 담긴 깊은 의미가 자신의 코나투스를 찾아가기 위한 새로운 탐험임을 알리는 과정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조만간 그 자유의 날개 위에 자리할 빛 좋고 결 고운 깃털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