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에서 살면서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출퇴근하는 토마스 캠벨(45) 수석매니저는 40대 중반의 나이다. 20대 후반에 가입한 퇴직연금을 벌써 40만 달러(4억 6,800만 원)나 적립했다. 직장 경력 15년차인 그는 연봉 7만 달러(8,190만 원)를 받는다. 회사에서 넣어주는 법정적립금과는 별도로 여윳돈으로 추가 가입한 개인형퇴직연금(IRP) 상품에 매년 1만 5,000달러(1,750만 원) 정도를 적립하고 있다. 이 상품은 주식형 펀드와 부동산 펀드 등 다양한 상품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연 9%대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캠벨 씨가 은퇴하는 시점까지 120만 달러(14억 400만 원)를 쌓는다면 퇴직 후 매년 8만 달러(9,360만 원)를 받을 수 있다. 노후 안전판인 디폴트옵션(사전운용지정제) 덕분에 금융 취약 계층이 연금 백만장자로 거듭난 것이다. 미국과 같은 연금 선진국과 달리 가입자의 수익률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국내 연금시장에 디폴트옵션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퇴직연금제도 개선을 추진하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나라는 원금 보장형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낮은 수익률에 그쳐 노후 안전판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미국의 401K 같은 퇴직연금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美 15년 전 디폴트옵션 도입…금융 취약 계층, 중산층으로 키워내=미국은 지난 2006년 연금보호법(PPA)을 제정해 디폴트옵션을 활성화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사업자에게 디폴트옵션 투자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면제해줘 근로자들이 디폴트옵션에 참여할 기회의 문을 대폭 확대한 점이다. 1981년에는 401K제도를 도입해 10년 가입자에게 연 8.3%의 수익률을 주는 등 연금 백만장자도 탄생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미국의 대형자산운용사 피델리티자산운용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9월 말 기준 100만 달러(약 11억 6,900만 원) 이상 연금 계좌를 보유한 가입자 수는 26만 2,000명에 달한다. 전년 대비 17% 증가하며 꾸준히 숫자가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퇴직연금 계좌(401K) 내에 주식과 펀드 등 다양한 금융자산 투자를 통한 100만 달러 노후 자산 형성, 일명 ‘401K 밀리어네어’를 목표로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그 과정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올리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실제로 최근 미국의 퇴직연금 가입자 분석 결과 수입이 낮고 연령이 어린 금융 취약 계층일수록 확정기여형(DC) 가입자가 급증하고 있다. 오무영 금융투자협회 상무는 “미국 내국세입법 401조 K항 규정에서 유래한 이 제도의 경우 자산 규모는 6조 4,000억 달러에 달해 미국 내 금융 취약 계층이 노후에는 중산층 부럽지 않게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호주에서는 퇴직연금 90%가 DC형…10년 가입자 연평균 수익률 7.9%=호주는 퇴직연금의 수익률 확대 조치로 1992년에 슈퍼애뉴에이션(Super Anuuation), 일명 ‘My Super’라는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다. 사용자가 근로자 급여의 9.5%를 의무 적립하는 강제 퇴직연금으로 가입자가 자유롭게 선택과 이동이 가능하다. 주부와 학생을 포함해 15세 이상 국민 중 92%가 가입하고 가입자 90% 이상이 DC 상품을 선택할 만큼 인기가 높다. 특히 가입자의 과도한 선택 부담을 완화하고 시장 경쟁 촉진을 통한 가입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게 설계돼 퇴직연금의 또 다른 성공 사례로 꼽힌다. 2000년 이후에는 시장 변동성과 상관없이 연평균 수익률 8%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교수는 “호주의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에 적극 가입하려는 것은 높은 수익률 때문으로 호주도 미국처럼 연금 백만장자가 속속 나오기 시작해 최근 호주의 젊은 층에서 생애 주기 맞춤형 타깃데이트펀드(TDF)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디폴트옵션은 반면교사”…퇴직연금 적극적 운용 길 열어야=디폴트옵션 도입에 유보적인 은행·보험권은 투자 손실을 누가 책임지냐는 명분으로 원리금 보장 상품을 디폴트옵션 적격 상품군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 상품이 포함되면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게 한국연금학회의 지적이다.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 상품을 편입해 수익률이 크게 떨어진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은 2018년 확정기여연금법 개정을 통해 디폴트옵션인 지정 운용 방법을 도입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지정 운용 방법 중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76.0%에 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편입하면서 오히려 도입 전인 2017년 70.7%보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기대 수익률을 높이려는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 특히 원리금 보장형 상품 도입 후 수익률 평균은 2.31%에 그치는 실정이다. 같은 기간 미국과 호주가 각각 9%, 8%대를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은행과 보험 업계가 주장하는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 제품을 넣게 되면 일본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명하다”며 “현행 DC형 제도가 원리금 상품 위주로 운용되고 가입자가 디폴트옵션이 아닌 원리금 상품을 선택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