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자동차·배터리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복합적인 위기 요인에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19와 미중 패권 경쟁이 초래한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에 현 정부가 힘을 쏟고 있는 탄소 중립 정책과 내년 본격 시행되는 각종 기업 규제까지 대내외적 요인이 한데 엮이며 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더욱 암울해졌다. 전문가들은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 때 개별 기업의 대응은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가 과감한 규제 완화와 연구개발(R&D)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탄소 중립 정책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많았다.
우선 다수의 전문가는 기업들이 마주한 내년 경영 환경이 올해보다 크게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은 “올해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4.0%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년은 3.0%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공급망 붕괴와 금리 인상 등 대외적 악재를 성장률 악화의 요인으로 꼽았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위드 코로나’ 국면으로 접어들며 경기회복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만큼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면서도 “원자재 가격 폭등세가 내년에 해소된다는 보장이 없어 성장세가 제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어 “배럴당 최고 10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가와 더불어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물류난 등이 장기화되며 기업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수출 제조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붕괴는 코로나19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에서 감염병 위험이 크게 낮아지지 않는 한 상당 기간 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코로나19로 경기 악화를 우려한 미국 행정부가 고용보험 보조금을 대폭 늘렸고 그 결과 항만 노동자들은 은퇴를 앞당기는 등 예상 밖의 현상이 나타났다”며 “이 문제는 노동력 공급이 시장에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발생한 것이기에 구조적이며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도 “원자재 수급 불균형 등 기업 생산활동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은 코로나19로 촉발된 것”이라며 “결국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오래 갈 수밖에 없다”고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김 명예교수는 또한 미중 갈등 관계가 공급망·원자재 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에 대해서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체제가 더욱 강력하고 공고해지기 전까지는 미국과 중국의 긴장 관계가 이어질 것”이라며 거시적 문제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해소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현장에서 나오는 기업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구조적 원인을 파악해 하루빨리 국가 차원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가 팔을 걷어붙여도 풀기 어려운 문제일 경우 위기 상황이 초래한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수 있도록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국력을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실장은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나서 삼성전자나 TSMC에 공급망 자료를 요청했지만 서로 맞물린 공급망의 물리적 한계 탓에 단번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결국 기업 규제를 완화하거나 R&D 지원을 확대해 기업의 비용 부담을 낮추고 미래 성장 동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차량용 요소수 문제를 언급하며 정부가 필요시 규제를 풀어 기업 활동에 미치는 제약을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재고가 여유 있는 산업용 요소수를 차량용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전환 과정에 있어서도 환경부 기준 등을 완화하는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강 교수는 “공급망 문제를 근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K반도체 벨트’ 조성 전략 같은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돼야 한다”며 “1~2년 안에 정책 성과가 나기는 어렵기 때문에 변화하는 추세에 맞춰 정부가 정책 일관성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탄소 중립 정책을 우리 현실에 맞게 재조정해야 한다고도 했다. 조 실장은 “신재생에너지는 구조적으로 간헐적 생산에 그칠 수밖에 없고, 에너지저장시스템(ESS) 기술도 성숙 단계까지 발달하지 못했다”며 “이 경우 전력 가격이 크게 오르거나 또는 한국전력이 빚더미에 앉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차기 정부에서 무조건 방향 수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부회장도 “수치만 의욕적으로 내놓으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된다”며 “탈원전을 포함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40%라는 목표를 산업계 현실을 반영해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기술을 R&D 하는 기업에 5~10%에 불과한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반면 다른 나라는 최대 50%까지 제공한다”면서 “정부가 산업계에 실질적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수치만 무책임하게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김 명예교수도 “탄소 중립 목표 과도하며 탈원전 취소하고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