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미국 정부는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 '45일 내로 반도체 재고와 고객사 등 공급망 정보를 담은 설문지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반도체 부족 사태가 지속되자 공급망 상황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마감시한을 몇 시간 앞둔 9일. 영업 기밀을 해외에 넘기는 것이 탐탁치 않지만 반도체 패권을 쥔 미국의 뜻을 거스르기도 어려운 터라 국내기업은 결국 자료를 제출키로 이날 결정했다.
“대한민국이 가진 유일한 기술패권은 반도체입니다. 그것도 메모리반도체에 한정돼 있습니다. 한데 메모리반도체마저도 제조에 필요한 소재부품장비는 물론이고 회로설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까지 대부분 미국을 통해 들여오고 있습니다. 미국 의존도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습니다.”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난 양항자 의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양 의원은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시작해 2014년 메모리사업부 플래시 개발실 상무로 올라섰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산업 전문가인 그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미국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미국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시각이다.
양 의원은 “미국은 반도체 종주국”이라며 “반도체 생산에 관련된 대부분의 특허와 원천기술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한국이 자체적으로 관련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자국 내에서 제품설계만 맡고 생산은 해외로 위탁하는 ‘팹리스(fabless)’ 형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전 세계 팹리스 회사 중 미국 기업이 차지하는 시장 비율이 60%를 웃돈다. 양 의원은 “우리나라는 해외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는 수준의 제조 역량을 지녔지만 파운드리 사업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말했다.
양 의원은 미국의 이번 요구가 일종의 편 가르기라고 봤다. 미국이 중국과 차세대 기술을 놓고 벌이는 패권 다툼이 심화하자 핵심 품목인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파트너 찾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양 의원은 “반도체는 승자독식 구조가 분명한 산업으로 최고의 기술을 가진 회사가 세계 5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미국은 중국에 앞서 4차 산업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려는데 핵심 부품인 반도체가 안정적으로 수급되지 않으면 계획 자체를 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봤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우군을 통해 수급을 안정화하겠다는 게 미국의 복안”이라며 “한국이 자국 편이 아니라고 인식한다면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 의원은 한국 반도체 업계가 “미국에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면서도 “미국에 모든 걸 다 내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했다. 국내기업의 반도체 기술 역량을 지렛대 삼아 협력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내기업이 재고량과 매출액, 거래처 등 기밀정보를 통으로 넘겨주기보다 자동차·컴퓨터 등 산업별 판매량 등 고객사와 비밀 유지 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자료를 제출하는 식이다.
양 의원은 미국에 보조를 맞추되 중국에 아예 등을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양 의원은 “단일 국가로 봤을 때 중국은 국내 반도체 업계의 최대 시장”이라면서 “미국과는 완전한 동맹 관계에 서면서도 중국과도 ‘협력적 공생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의 요구 수위를 낮추면서도 중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반도체 전문가”가 국가 간 협상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양 의원은 강조했다. 양 의원은 “협상 중 한국의 실리를 최대화하기 위해선 각국이 어떤 기술과 제품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면서 “반도체 산업 전문가가 최전선에 배치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중 틈바구니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생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양 의원은 이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정은 최근 ‘핵심전략산업 특별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각종 지원책을 마련했지만 보완할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당정이 반도체 설비투자 등에 세액공제 혜택을 확대하겠다면서도 지원 대상을 일일이 심사해 시행령에 특정하도록 한 게 대표적이다. 양 의원은 “기업의 전략은 빠르게 바뀔 수밖에 없고 맞물려 필요한 설비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면서 “특정 설비에 대한 지원이 왜 필요한지 매번 설명토록 하고 이를 연간 단위로 시행령에 명시한다면 지원 속도가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양 의원은 “정부는 특혜 시비를 피하기 위해 심사가 불가피하다고 하나 반도체 산업에서 말하는 초격차도 불과 몇 개월 차이로 승패가 나뉘는 만큼 기존의 틀을 깨는 지원 형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양 의원은 “반도체 업계가 기술개발을 하는데 제일 필요한 게 사람”이라면서 “국내 메모리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비메모리 등 다른 영역에서도 인재가 필요한데 한정된 인력을 가지고 양쪽을 모두 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양 의원은 기업 활동을 옥죄는 제도적 개선과 이를 통한 간접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양 의원은 “주 52시간제를 모든 직종에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면서 “연구개발(R&D)직처럼 특정 기간에 집중적인 업무가 필요한 업종에 대해서는 일을 시간이 아닌 총량으로 계산할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 의원은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상속세 개선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나라 상속세는 30억원 이상 시 최고세율 50%, 대주주 경영권 포함한 주식에 대해선 60%까지 과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며 경영권 포함 주식에 한정해서 보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양 의원은 “해외와 비교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상속세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며 “부의 대물림 차단뿐 아니라 기업의 영속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