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스포츠 문화

파크애비뉴의 그 아파트는 왜 저렇게 가늘고 길까?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

리처드 윌리엄스 지음, 현암사 펴냄

도시는 설계 아닌 인간자취 따라 변화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 공간'으로

순환의 프로세서로 자본·성적 욕망 등

6가지 제시 세계 도시 사례 들어 설명

세계적인 관광 도시 베네치아는 세련된 현대 도시와는 다른 과거의 어느 시대에 머무른 듯한 특유의 이미지로 사랑받고 있다. 저자는 이 베네치아의 ‘오늘의 얼굴’은 단순히 역사적 건축물이나 유적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프로세스’ 개념을 제시한다.세계적인 관광 도시 베네치아는 세련된 현대 도시와는 다른 과거의 어느 시대에 머무른 듯한 특유의 이미지로 사랑받고 있다. 저자는 이 베네치아의 ‘오늘의 얼굴’은 단순히 역사적 건축물이나 유적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프로세스’ 개념을 제시한다.




왜 우리의 도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매일 걷고 지나치고 살아가는 이 도시는 언제부터 지금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가본 적은 없어도 ‘베네치아’ 하면 쇠락·인간 존재의 나약함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아이슬란드 하면 ‘자연’과 ‘힐링’을 그린다. 이렇듯 사람들은 도시의 시간을 오랜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고정하고, 그 지점의 그럴듯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통념을 만들어내곤 한다.



신간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는 이처럼 도시를 고정된 대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20년 넘게 도시의 시각 문화를 연구해 온 저자는 “도시가 고정되고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 공간”이라며 도시의 오늘을 새로운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책의 전제는 ‘도시는 설계의 산물이 아닌, 철저히 인간의 자취를 따라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적인 관광지 베네치아 하면 많은 이들이 ‘역사적 건축물과 유적이 만든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이런 단순한 요인으로는 이곳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베네치아는 이미 18세기부터 영국 귀족 자제들이 그랜드 투어(유럽 유람)를 할 때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다.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 이 곳을 찾은 문학 청년들은 베네치아가 지닌 ‘몰락’이라는 관념에 빠져 이곳 특유의 쇠락해가는 이미지를 사랑했고, 이 이미지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 더 나아가 역사 진보의 덧없음으로 확장됐다. 도시에 붙은 이런 ‘신화화된 관념’은 현대화를 가로막고, 오늘날의 관광지 베네치아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역사적 건축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 같은 맹목적인 숭배를 유발한 접근에 비판적이지만 말이다.

미국 뉴욕의 대표 랜드마크인 432 파크 애버뉴 빌딩은 기형적으로 가늘고 높은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두개 층에 뚫린 구멍 등 독특한 외형에는 ‘자본’이라는 프로세스가 반영돼 있다./사진=Halkin Mason미국 뉴욕의 대표 랜드마크인 432 파크 애버뉴 빌딩은 기형적으로 가늘고 높은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두개 층에 뚫린 구멍 등 독특한 외형에는 ‘자본’이라는 프로세스가 반영돼 있다./사진=Halkin Mason



베네치아 이야기처럼 도시는 복수의 ‘프로세스’가 빚어낸 결과다. 저자는 산업·주제·요인 같은 용어 대신 ‘프로세스’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고정된 무엇이 아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순환하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책에서 저자는 자본, 정치권력, 성적 욕망, 노동, 폭력, 문화라는 6가지 프로세스 이용해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적인 도시들을 새롭게 해석해 나간다. 자본의 속성이 도시를 구성하는 건물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이를 위해 등장하는 곳은 미국 뉴욕, 미드타운 맨해튼에 위치한 초호화 아파트 ‘뉴욕 432 파크 애버뉴 아파트’다. 85층 425m의 이 아파트는 가로세로 모두 30m가 채 되지 않는 ‘가늘고 높은’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기다란 나무젓가락 같은 외형 탓에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12층마다 두 개 층을 뚫어 바람이 건물 외벽을 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놀라운 점은 주거용 빌딩임에도 불구하고 상시 거주 세대는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에서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평균 3,800㎡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 이 건물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안전 금고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땅값 비싼 맨해튼에선 임대료를 최대한 끌어내려다 좁은 부지에 최대한 높게 쌓아 올린 기형적인 건물이 탄생했다고 한다. 뉴욕에서 마천루, 철강 건축, 엘리베이터 기술이 발달한 것도 모두 이런 사정에 기인하다. 저자는 “이 아파트에서 중요한 건 주거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돈을 묻어둘 수 있는 금고로서의 가치”라며 “철저히 자본에 필요에 맞춰 생산된 건물이 432 파크 애버뉴이며 이곳엔 계속 새로운 마천루들이 높이를 갱신하며 새로 지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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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미래 자본의 중심 도시 ‘1순위’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책에서는 ‘자본의 흐름’이라는 프로세스를 고려할 때 경이로운 자연으로 유명한 아이슬란드가 블록체인의 중심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전문가들의 전망을 소개한다.이곳이 미래 자본의 중심 도시 ‘1순위’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책에서는 ‘자본의 흐름’이라는 프로세스를 고려할 때 경이로운 자연으로 유명한 아이슬란드가 블록체인의 중심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전문가들의 전망을 소개한다.


자본의 흐름이라는 프로세스는 도시 환경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블록체인과 아이슬란드다.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기술의 중심지이자, 미래 자본의 중심지가 될 곳으로 아이슬란드를 꼽곤 한다. 가치를 데이터로 암호화해 저장하는 블록체인의 특성상 전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이 데이터 센터로 적합하고, 이 때문에 블록체인 기술의 중심지는 도시보다 재생 가능 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금융·경제가 발달한 세계의 대도시를 제치고 경이로운 자연의 도시 아이슬란드가 언급되는 이유다.

성적 욕망 역시 도시를 변화시키는 프로세스다. 뉴욕 허드슨 강 동쪽의 첼시 부둣가는 한때 뉴욕 해상 운송의 중심지였지만, 쇠퇴를 거듭하며 버려졌다. 그러나 맨해튼에서 걸어갈 수 있는 이곳은 1970년대 남성 동성애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떠올랐고, 이에 주목한 예술가들은 이곳의 모습을 사진이나 미술 작품으로 남겼다. 이 부둣가를 실제 방문하고, 이용한 사람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부둣가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했고, 이후 휘트니 미술관이 들어서며 한때 버려졌던 도시는 세계 미술계의 중심이 됐다.

책은 정치·경제·문화·역사 등 폭넓은 관점에서 도시의 다양한 표정을 입체적으로 포착한다. 저자는 도시를 프로세스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작업에 대해 “도시가 왜 지금처럼 보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더 나은 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한다. 내가 알던 도시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이다. 1만 6,000원.



송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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