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문모(34)씨는 옷을 구매할 때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브랜드만 골라 산다. 니트 한 개에 5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지만, 남들이 알아보는 것을 딱히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씨는 "옷을 착용하는 사람의 개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해 로고가 너무 강한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는 편"이라며 "최근에는 수입 명품 브랜드보다 국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나 상품의 품질이 더 높다고 생각해 홍대, 이태원 인근의 국내 편집숍을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업계에서 '조용한(Quiet) 럭셔리'가 뜨고 있다. 조용한 럭셔리는 샤넬과 아미, 코닥 등 '빅로고' 브랜드와 반대로 로고 노출을 최소화하고 핏과 소재에 집중하는 패션 트렌드를 뜻한다. 과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주로 경기가 불황일 때 주목을 받아왔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됐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데다, '내 기준'을 중요시하는 MZ세대들의 소신 소비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8일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따르면 프랑스 컨템포러리 브랜드 '르메르'의 올해 1~10월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130% 증가했다. 르메르는 1992년 론칭한 파리지앵 감성의 브랜드다. 절제되고 은은한 디자인으로 코튼 리넨과 드라이 실크를 사용한 디자인이 인기다. 여성 재킷과 셔츠 가격은 각각 148만 원, 68만 원이다. 그럼에도 어느 부위에서도 로고를 찾아볼 수 없어 조용한 럭셔리 브랜드의 대표주자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관계자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콘셉트에 얽매이기 보다 오랜 시간 일상에서 빛을 발하는 브랜드"라고 말했다.
W컨셉에서도 올해 1월부터 이달 25일까지 '앤유'와 '모한', '플로움' 등 전반적으로 디자인이나 소재, 핏에 강점을 가진 브랜드 매출이 전년 동기간 대비 약 70% 늘었다. W컨셉의 주 고객은 경제력을 갖춘 20대 후반~30대 여성이다. 이에 W컨셉은 올해 모던하고 실용적인 의류를 선보이는 '르니나'를 입점시키기도 했다.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는 잡화에서도 나타난다. W컨셉 '에르베'의 올해 1~10월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110% 성장했다. 이 브랜드는 로고를 내세우지 않고 고급스러운 천연 가죽 소재를 적용해 우아한 디자인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안지수 W컨셉 KAM팀 팀장은 "20~30세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의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디자인과 핏, 소재에 차별점을 가진 신규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굴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명품계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글로벌 커머스 파페치 등 패션 해외직구 사이트에서는 스웨덴의 아웨레가시를 비롯해 질 샌더, 오라리 등이 판매 상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패션업계는 코로나19로 침체된 경기 상황도 조용한 럭셔리의 부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기가 악화되자 명품 브랜드 셀린느와 끌로에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샤넬과 구찌 등 빅로고 브랜드를 착용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울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또 최근 샤넬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이 발생하는 등 명품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빅로고 명품은 자신이 무엇을 입었는지를 알아봐주길 원하는 심리가 반영됐다면, 조용한 럭셔리는 내 기준과 만족이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소비 과잉의 시대에서 제대로된 하나를 구매해 오래 쓰겠다는 성숙된 소비 심리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