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인들의 일상을 바꿔 놓은 팬데믹은 밴드 자우림에게도 절망이었다. 오프라인 공연과 멀어지면서 팬들과 대면할 수 있는 일이 사라졌고, 그나마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공연을 하면서도 아쉬움은 떨칠 수 없었다. 모두가 좌절에 빠진 시기, 어두운 곡으로 가득 찬 앨범을 발매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해를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이들의 정규 11집은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26일 발매된 자우림(이선규, 김윤아, 김진만)의 11번째 정규 앨범 ‘영원한 사랑’은 깊고 어두운 내면을 건드리는 앨범이다. 지난해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번아웃에 빠진 자우림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어두운 곡들을 현실적인 절망과 불안에 빠져 있는 세상에 내놓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여겨 잠시 미뤘다. 대신 따뜻한 노래들을 새로 만들어 자우림의 최초의 EP 디지털 앨범인 ‘홀라!(HOLA!)’를 발표했었다.
“지금 우리가 희망을 보기 시작했잖아요.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길에 서 있으니까 지금 이 음악을 던져도 큰 민폐는 아니겠다’고 생각한 시점이에요. 이 음악이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은 음악일 뿐이죠. 다만 여러분이 이 음악을 너무 마음에 비수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됐을 것 같아 발매를 결정하게 된 것이에요.”(김윤아)
타이틀곡 ‘스테이 위드 미(STAY WITH ME)’는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금 함께 해달라며 불안한 감정을 토로하는 곡이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해 자우림만의 매력이 극대화됐다. 사실 앨범에 수록하지 않으려고 했던 곡이라는 것은 비하인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니터링을 해 준 주변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타이틀곡으로 결정됐다.
“멤버들은 편곡하고 수백 번씩 듣기 때문에 주변 분들의 모니터링 의견을 들었거든요. 특히 젊은 분들이 ‘이 곡이 타이틀곡이다. 당연한 것 아니에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타이틀곡으로 정하게 됐어요.”(김진만)
“저는 아직까지도 다른 걸 타이틀곡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유희열 씨가 이 곡이 무조건 타이틀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로소 ‘이거 하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이선규)
이번 앨범은 총 12트랙이다. 고통의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진한 감정이 묻어나는 ‘페이드 어웨이(FADE AWAY)’를 시작으로, 김윤아가 김진만의 결혼식 축가로 만들었다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순서대로 트랙을 들으면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자우림은 리스너들이 어느 한 곡만이 아닌,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주길 바랐다.
“곡 순서가 중요해요. 1번부터 7번 트랙까지 서사적인 흐름도 있고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앨범이기 때문에 순서를 배치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런 것들이 옛날 밴드들이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우리는 신경을 많이 쓰죠.”(이선규)
“이 앨범을 들어보고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친구들이 만든 음악이라고 느꼈어요. 어렸을 때 위인전을 보거나 멀리 있는 사람을 보고 롤 모델을 찾잖아요. 저는 주위에 있는 김윤아, 김진만이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 선택하는 것들을 보고 ‘쟤네처럼 살면 되겠다’고 생각해요.”
앨범의 색을 표현하자면 검붉은색. 어두운 색채가 지배적이다. 한 가지 메시지가 있어서라기보다 ‘우리가 좋은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자우림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이번 앨범을 완성했을 때도 “우리가 해냈다” “좋은 것을 완성해냈다”는 충족을 느꼈다. 서로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파급력 있고 좋은 영향력 미칠 수 있는 분들이 하시면 좋을 것 같고, 저희는 ‘지금 우리는 이래’라는 생각으로 했어요. 어두운 측면이 많이 들어있는데, 자우림은 계속 그래왔다고 생각해요. 우리 세 명 안에 있는 부분이라 꾸며서 나오는 것도,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런 부분이 있을 거예요. 11집은 검붉게 어두워서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김윤아)
공연 위주의 밴드에게 코로나19는 위기였다. 지난 6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긴 했지만, 지난해에는 무대에 설 기회가 현저히 줄었다. 그러면서 유튜브에 라이브 영상을 올리는 시도도 했다. 온라인 전용 공연장도 만들어지고 새로운 포맷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무대를 위해 필요한 훌륭한 음향, 조명 등이 작은 모니터 안에서 보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우리도 우리지만 공연을 지지해 주기 위해서 같이 일해주는 업체가 굉장히 많이 있잖아요. 연주하는 세션, 악기 업체 등도 생업이 걸린 문제였어요. 공연이라는 게 설립이 안되니까 도산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주위에 많았죠. 그런 걸 보는 게 우리로서는 가슴이 아팠어요. 자우림이 그런 상황에서도 몇 번인가 공연도 했고 다행히 행사도 있어서 주로 온라인으로 송출되는 페스티벌이나 지자체에서 하는 비대면 공연을 했어요. 기회가 되면 모두 하려고 했는데 우리와 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같이 공연을 만드는 팀 때문이었죠. 지금 뛰어 앉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상황이 좋아졌으면 해요. 밖에서 보이기에는 즐거운 축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걸 만들기 위해 밑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받쳐주고 있거든요.”(김윤아)
“함성이 없는 공연도 나름의 레퍼토리가 있어요. 관객분들이 앉아 있어야만 하고 소리를 내지 못하니까 음악적으로 풍성하게 시도할 수 있어서 좋은 점이 없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번 콘서트를 준비하며 편곡을 위해 다른 영상을 찾아봤는데 사람들이 슬램(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과 서로 몸을 부딪치며 흥을 돋우는 일)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며 ‘이런 록 페스티벌 정말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독 공연도 단독 공연이지만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고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뛰노는 공연을 하게 되면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요.”
1997년 데뷔한 자우림은 내년이면 25주년을 맞이한다. 자우림의 노래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 “이건 내 이야기다”라고 공감할 수 있는 것. 이들은 모든 앨범에서 쭉 같은 사람을 화자를 놓고 노래를 만들어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연령도 중요하지 않은 단지 청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갈등과 갈증이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한다. 그게 바로 자우림의 힘이다.
“저희도 물리적으로는 많이 변했죠. 대신 청춘의 감성을 잃지 않는 것 같아요. 세상에서 들리는 음악들, 보이는 것들에 항상 관심 갖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요.”(이선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해요. 기성세대가 지금을 부정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고착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것이에요. 저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눈과 귀를 열려고 해요.”(김윤아)
“우리는 항상 ‘나나 잘하자’라고 생각해 와서 계속 그럴 것 같아요. ‘우리가 흡족할 수 있는 다음 앨범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데뷔 37주년을 맞은 권인하 선배님이 ‘넥스트 레벨’ 라이브를 들려주셨는데, ‘이 선배님 정말 존경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환하고 밝고 유머러스하시고, 부끄러워하시면서도 새로운 걸 계속 하시죠. 우리가 어른으로서 어떤 걸 해야 한다기보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세 멤버의 환상적인 호흡 역시 20년 넘게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친밀할수록 예의를 지킨다. 현실적으로 같이 일하는 부분은 관계의 3분의 1 정도라고 생각하며 서로 간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고, 건드리지 않아야 할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런 동료들과 함께이기에 ‘매순간’ 밴드하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냥 밴드를 해서가 아니라 이분들과 함께 해서 잘 됐다고 생각해요. 다 정말 잘 아는 거지만 존경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난다는 게 흔치 않는 행운이데 전 두 분이나 만났잖아요. 이런 분들과 함께 해서 오랫동안 할 수 있었어요.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원하는 걸 알아요.”(김윤아)
“25주년 기념이요? 내년에도 우리의 활동을 쭉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