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쌓인 서울 송현동 덕성여중 앞길을 걷다 보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장면과 마주한다. 영화 속 소품으로 등장할 것 같은 우편함. 노란색 지붕과 기둥, 흰색 함으로 따뜻함을 입힌 우편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손끝으로 전하는 마음, 온기우편함’.
온기우편함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누군가 익명으로 고민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손 편지로 답장을 받을 수 있다. 내용은 조현식 온기우편함 대표와 고민 편지에 답을 하는 온기우체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다. 그 자체가 개인 정보이기에 철저한 보호가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e메일도 있고 타이핑해 답장을 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든 손 편지를 선택했을까. 조 대표는 3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사람 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타이핑은 모든 글씨가 똑같지만 손 편지에는 각자의 서체에 마음이 담겨 있다”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타이핑에 비해 느리고 힘도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지만 사람의 온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온기우편함의 시작은 지난 2012년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잡화점에 침입한 미래의 도둑 3명이 과거로부터 온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음을 조 대표는 책이 아닌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2017년 2월 삼청동을 출발점으로 덕수궁 돌담길, 노량진 고시촌, 혜화동 등에 우편함을 세웠다. 지금은 서울 9곳에서 노란색 우편함을 발견할 수 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다양하다. 10대는 공부나 친구와의 관계, 20~30대는 취업과 진로 관련, 50대 이상은 삶에 대한 질문과 육아 문제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다른 고민도 많다. 실제로 조 대표가 처음 받은 편지는 연인 간의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고 한다. 코로나19 때는 ‘무기력’에 대한 호소가 밀려들었다. 그는 “편지에 우울감·고립감 같은 내용의 빈도가 확실히 늘었다”며 “고립되고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답장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연령층의 온기우체부가 담당한다. 조 대표는 “각자 삶에 쫓기다 보면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은데 이 분들은 예외"라며 "답장 한 통을 쓰는 데 2~3시간 걸리는 힘든 작업이지만 모두 기꺼이 시간을 내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답장을 쓰는 데는 원칙이 있다. 편지 쓴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되 절대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당신의 고민을 함께한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데 힘쓴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답을 주기보다 고민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내가 고민의 당사자라면 이런 위로를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쓴 답장이 지금까지 1만 1,500통이나 된다. 따뜻한 편지에 대한 반향은 컸다. 온기우편함 홈페이지에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이 보낸 것 같아 한참을 울었다’ ‘무려 5장의 답장을 읽으며 나의 괴로움을 이해해준다는 것에 감사했다’ 등과 같은 답글이 쇄도했다. 최근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으로부터 선행상을 받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서울 지역에만 있는 온기우편함을 지방에서도 볼 수 있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60대 이상을 위해 오래된 영화관에서 고민 편지를 받아 따뜻한 위로를 전해보고도 싶다. 조 대표는 이를 위해 변치 않는 마음을 다짐한다. “가장 큰 목표는 진심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겠다는 진심만큼은 지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