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등 각국이 첨단 과학기술 전쟁에 나선 가운데 정부가 미국과의 과학기술 동맹 구축에 나섰다.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로 양자 기술, 에너지, 6G 통신 기술, 반도체 기술 등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한미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정부·민간 전체를 아우르는 기구로 격상할 방침이다. ‘국제기술협력기금’ 조성도 추진한다.
이는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에 과학기술 최강국인 미국과의 협력을 늘리기 위해서다. 미국은 올 초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을 강화, 내각 수준의 지위를 부여하고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이는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터, 가상현실, 블록체인, 재생 의료 등 첨단 기술력에서 중국에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지난해 자료를 보면 한국·미국·독일·일본·중국 5개국의 AI·블록체인·사물인터넷(IoT) 등 9개 신산업 분야 인력 경쟁력에서 최하위에 머물렀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올 5월 정상회담을 갖고 “AI, 5G, 6G, 오픈랜 기술(이동통신 기지국 장비의 단위별 운영체제와 인터페이스를 개방, 표준화), 양자 기술, 바이오 기술 등 신기술 분야에서 혁신을 주도함으로써 미래 지향적 파트너십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협력한다”고 합의했다.
이와 관련,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13~14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 에릭 랜더 OSTP 실장을 만나 첨단 기술 동맹 강화를 논의했다. OSTP는 미국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 정책 총괄 기관으로 과학기술 정책 마련, 예산 수립과 집행, 원자력·핵 관련 조언 등을 한다.
이 자리에서 임 장관은 “신기술 표준화 협력, 공동 연구, 인력 교류 확대 등을 구체화하자”며 “양자 기술에 대한 협력 강화를 위해 ‘양자 기술 협력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랜더 실장은 공감을 표한 뒤 반도체, 탄소 중립을 위한 에너지 혁신 기술 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 사람은 각각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한미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정부와 민간을 아우르는 종합 채널로 강화하기로 했다. 한미 기술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국제기술협력기금’ 설치도 논의했다.
임 장관은 이어 제시카 로즌워슬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을 만나 “6G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공동 연구와 국제 주파수 결정 기구에서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이에 로즌워슬 위원장은 높은 관심을 보이며 오픈랜 기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국제기구에서 협력이 부재했다는 점에 공감하며 정기 실무 회의를 갖기로 했다.
임 장관은 기초과학과 공학 전반에 대한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세투라만 판차나탄 총재와도 만나 양자 기술 분야에서의 신속한 업무협약 체결을 희망했다. 양자 기술에 대한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를 체계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특히 임 장관은 바이오와 반도체 기술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양국 연구자와 기관이 참여하는 ‘한미 합성생물학 공동 콘퍼런스’와 ‘한미 반도체 기술 연구자 포럼’을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판차나탄 총재는 공감을 표하며 조만간 ‘한미 연구자 공동 워크숍’ 등 양자 기술 협력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임 장관은 이번 방미길에 한미 원자력 공동 연구개발(R&D)에 공헌한 존 허첵 전 미 에너지부 부차관보 측에 과학기술 훈장(웅비장)을 수여하며 한미 원자력연료주기 공동연구(JFCS)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요청했다. 미 에너지부와 원자력을 포함한 에너지 기술 협력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의 김복철 이사장은 “출연연과 대학에서 선도형 R&D를 통해 핵심 기술의 우위를 확보하고 기업들은 ‘초격차’ 제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연구 현장에서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에 대해 격려하며 창조적 융합을 꾀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국제 질서가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의 과학기술 인식이 중요한데 정작 주요 대선 주자들의 행보에서는 과학기술이 잘 보이지 않아 걱정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