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처럼 미술이 전국민적 관심을 받은 때는 없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집한 최고 수준의 미술품·문화재 2만3,000점이 국가에 기증됐고 ‘이건희 컬렉션’을 보려는 관람객으로 연일 매진행렬이 이어졌다. 시중에 풀린 여유자금과 코로나19 이후의 ‘보복 소비’ 경향이 맞물리면서 미술시장은 연간 거래액 9,200억원을 넘겼다. 전년 대비 2.8배의 수직 성장이다. 명품시장에서 구매력을 과시하던 MZ세대가 본격적으로 미술품 구입에 관심을 가진 게 결정타였다. 여기다 디지털아트와 가상 자산을 접목한 NFT(대체불가토큰)와 메타버스의 등장은 미술의 새로운 영역으로 부상했다.
이 회장 별세 6개월 후인 지난 4월 28일, 삼성가(家)는 고인의 사회환원 계획을 발표하며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점을 국립박물관과 지방 공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만 2만1,600여 점의 명품이 들어갔다.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30대 때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며 처음 구입한 국보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국보만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이 회장이 거실에 걸어놓고 감상했다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비롯해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폴 고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회화와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 등 총 1,488점이 기증됐다. 김환기의 푸른빛 점화(點畵)와 초대형 ‘여인들과 항아리’, 소 그림 두 점을 포함한 이중섭 작품만 104점이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기증작 특별전은 ‘전일 매진’을 기록했다.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한 관람인원 제한 탓에 약 2만3,000명이 방문했고, 대구미술관은 약 4만명, 전남도립미술관에는 약 3만명이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다녀갔다. 내년 3월까지 이어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누적 관람객 4만2,000명까지 합하면 15만명 이상이 기증 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정부가 기증작을 통합 관리할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논의하자 전국 지자체들의 유치경쟁이 벌어졌고 종로구 송현동으로 부지가 확정됐다. 이 회장의 기증을 계기로 상속세를 미술품·문화재로 대납할 수 있는 ‘물납제’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023년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지난 1월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1929~2021) 타계 이후 경매에 나온 유작이 경합을 벌이며 10억원을 넘겼고, 14억 원의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미술시장에 ‘호황’ 시그널이 반짝였다. 5월에 열린 아트부산이 350억원, 10월에 열린 키아프서울이 650억원어치의 그림을 팔아치우며 국내 아트페어 사상 최대 매출 기록을 잇달아 경신했다. 서울옥션은 하루 낙찰 총액 243억원, 최고 낙찰률 95%를 보여줬고, 케이옥션은 내년 초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5,000억원의 벽을 못 넘기던 한국미술계가 ‘1조원 시장’을 내다보게 됐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케이아트마켓의 추산에 따르면 올해 거래 총액은 약 9,223억원이며, 경매 낙찰총액은 3,280억원이다. 이는 지난해는 물론 코로나 이전인 2019년보다도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유동성 완화로 늘어난 시중자금, 부동산과 주식에 이어 대체 투자처에 대한 모색, 억눌린 문화소비에 대한 ‘보복쇼핑’ 경향이 반영됐다. 문화적 욕구와 구매력, 재테크 감각을 겸비한 MZ세대와 X세대가 새로운 미술품 수요의 주류로 부상했다.
소비층의 변화와 함께 디지털 아트와 가상자산을 접목한 NFT 미술시장이 급성장했다. 카카오의 블록체인 계열사 그라운드X가 미술품 NFT시장에 진출했고, 경매회사와 전문업체가 연이어 NFT플랫폼을 개설하고 있다. 메타버스와 결합한 미술은 물리적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험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티앤씨(T&C) 재단이 혐오와 차별반대를 주제로 기획해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연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출품작의 NFT경매를 통해 낙찰액 4억7,000만원 중 재단 수익금을 기부했고, 메타버스 제페토에서 개관한 전시에는 누적 수치 20만 명이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