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작은 해안가 마을 노스베릭에는 제주 산방산과 꼭 닮은 산이 하나 있다. ‘노스베릭 로’라는 곳으로 산방산처럼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다. 로(Law)는 스코틀랜드어로 주변보다 높은 언덕을 말한다. 해발 187m의 노스베릭 로는 주변이 온통 평지인 덕에 어디서나 잘 보인다. 이 산을 이정표 삼아 가면 노스베릭이다. 시내에서 해안가로 이어지는 작은 길로 방향을 틀면 곧바로 골프 코스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듯하다. 노스베릭 골프클럽이다.
사람들은 17세기부터 노스베릭 해안에서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노스베릭 골프클럽이 결성된 건 1832년이다. 전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오래된 클럽이다. 노스베릭 골프클럽은 크고 작은 골프 대결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중 1875년 9월 4일 벌어진 톰 모리스 부자(父子)와 윌리·먼고 파크 형제의 팀 매치에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올드 톰’의 아들 ‘영 톰(1851~1875)’의 애절한 죽음이다. 골프 천재로 불리던 영 톰이 이 대결 후 석 달 만에 죽은 것이다. 골프 대결과 그의 죽음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당시 올드 톰과 윌리 파크는 라이벌 관계였다. 초창기 디 오픈에서도 둘은 챔피언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1860년 1회 디 오픈에서 윌리가 우승했고 1861·1862년은 올드 톰, 1864년은 윌리가 우승하는 식이었다.
1874년에 올드 톰은 노스베릭에서 벌인 윌리와의 1 대 1 대결에서 졌다. 올드 톰은 그 패배를 되갚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성사된 게 이듬해 9월 노스베릭에서 벌어진 2 대 2 매치다. 하지만 대결이 벌어진 날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영 톰의 아내 마거릿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마거릿의 죽음을 두고 올드 톰이 경기 중 ‘마거릿이 위중하니 빨리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도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아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등 여러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신문인 스코츠맨에 따르면 전보는 모리스 부자가 이긴 뒤에 도착했다.
영 톰은 이 일로 깊은 실의에 빠졌다. 매일 술에 절어 건강이 악화됐다. 영 톰은 눈보라 치는 11월의 매서운 날씨 속에 한 도전자와 6일 동안 12라운드 마라톤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몸은 더욱 상했다. 그리고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아버지가 아들의 집을 찾았을 때 영 톰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다. 사인은 폐출혈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영 톰은 1868년 17세에 처음으로 디 오픈 정상에 오른 뒤 1872년까지 4연패(1871년에는 열리지 않음)를 한 골프계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17세에 메이저 대회 제패와 4연패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이다. 그가 경기를 할 때면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수천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 기차로 600여 ㎞ 떨어진 런던의 주요 신문사와 잡지사들이 특파원을 파견할 정도였다.
광부의 딸이었던 마거릿은 영 톰보다 열 살이나 많았고 사생아를 낳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영 톰은 어린 시절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았다. 영 톰의 부모는 그런 마거릿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은 듯하다.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에도 아내를 선택한 영 톰은 결혼 1년 만에 아내와 아이를 잃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아내와의 영원한 사랑을 지키고 살아생전 안아보지 못한 핏덩이를 만나러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영 톰의 결혼식이나 아내 마거릿의 사진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세인트앤드루스에 사진사들이 많았고 영 톰이 혼자 또는 아버지나 누이들과 찍은 사진은 여러 장 있는 것에 비하면 미스터리다. 혹시 잘못 들인 며느리 때문에 젊은 아들을 잃었다고 비통해 한 올드 톰이 그 흔적을 지운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