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눈발이 휘날리는 영하의 날씨였음에도 이른 새벽부터 15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와 롤렉스 등 명품을 구매하기 위한 대기 줄이었다. 추위를 막기 위한 텐트와 휴대용 난로 등 각종 방한용품이 동원됐다. 예비 신부 한 모(33) 씨는 “예물로 샤넬 클래식을 사려고 하는데 1월에 가격이 오른다는 얘기가 있어 서둘러 왔다”며 “원하는 모델이 없으면 다음 주에도 와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화점 새해 첫 영업 날은 명품을 사기 위한 ‘오픈런’으로 시작됐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는 200여 명이 줄을 섰는데 이는 평소 주말 대비 2배가량 많은 규모다.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도 100여 명이 오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달 초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가 가격을 올릴 것으로 전해지면서 인상 전 ‘막차’를 타려는 소비자들이 많아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해외여행 정상화 시기가 멀어지면서 국내 명품 수요가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하이엔드급 명품 브랜드는 올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명품 업계에 따르면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샤넬·롤렉스 등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올해도 1월부터 가격 인상을 단행할 예정이다. 시작은 롤렉스가 끊었다. 롤렉스는 전날 가격을 8~16%가량 인상했다. 롤렉스가 가격을 올린 건 지난 2020년 1월 이후 약 2년 만이다. 인기 모델인 ‘서브마리너 논데이트’는 985만 원에서 1,142만 원으로 16% 올랐다. 서브마리너 중 ‘스타벅스’ 별칭을 가진 모델은 하룻밤 새 1,165만 원에서 1,357만 원으로 192만 원(16.5%)이나 인상됐다.
명품 가격 인상 시기는 보통 1월에 집중된다. 에르메스의 경우 매년 1월마다 가격을 2~5%가량 올린다. 지난해에는 1월 첫째 주에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인기 가방인 ‘가든파티36’ 가격은 473만 원에서 482만 원으로 약 2% 인상됐다. 이어 루이비통이 100만 원대 저가 제품을 위주로 가격을 최대 25.6% 올렸다. 프라다도 지난해 1월 말 2~4%가량 가격을 인상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글로벌 정책에 따라 유럽을 시작으로 아시아까지 매년 1월에 가격 인상이 집중되고 있다”며 “올해는 물류 대란 여파로 인상 폭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상이 ‘배짱 영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가격 인상 주기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돌아오는 데다 배경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다. 실제 샤넬과 프라다는 지난해에만 각각 4차례, 6차례 가격을 인상했다. 이는 연중 역대 최대 규모다. 패션 업계 관계자는 “문제는 같은 시즌임에도 가격을 올린다는 것”이라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같은 물건인데 하루 차이로 100만 원이 오르는 걸 납득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격 인상에도 국내 명품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갤러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하이주얼리&워치와 명품 잡화 매출은 각각 전년 동월 대비 67%, 49% 증가했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과거 면세점과 해외 아웃렛으로 몰리던 명품 수요가 국내에 묶인 여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욕 하면서 산다”는 말까지 나온다. 직장인 박 모(31) 씨는 “가방 하나를 사기 위해 실적을 채우려면 그릇·지갑·벨트까지 구매해야 하는 구조”라며 “VIP에게만 인기 모델을 몰아주는 ‘등급제’도 대표적인 갑질”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명품 브랜드는 올해도 실적 고공 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해외여행 정상화 시기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에르메스코리아의 2020년 매출은 4,191억 원으로 전년 대비 15.8% 증가했다. 루이비통은 2020년 사상 처음으로 1조 원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샤넬 역시 영업이익이 1,491억 원으로 34.4% 늘었다. 시장조사 기업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명품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4.6% 증가했다. 명품 업계 관계자는 “아직 발표 전인 지난해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