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 국제 질서)’와 ‘팍스 시니카(중국 주도 국제 질서)’를 각각 지향하는 주요 2개국(G2)이 충돌하면서 신(新)냉전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군사·이념 위주의 극한 대결이었다면 현재 미국과 중국 간 신냉전은 과학기술·첨단산업 중심의 패권 경쟁이다.
미국은 그동안 적대국은 물론 동맹국이 또 다른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현재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상무부나 재무부의 허가 없이는 미국의 기술·제품 수입이나 미국인 투자 유치를 금하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이나 기관이 총 100곳을 넘는다. 신성철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경제·안보·복지 분야를 포함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 모두 과학기술에 달린 기술 패권주의 시대”라며 “초연결·초지능·초융합이라는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우리가 정보통신기술(ICT) 파워와 과학기술 선도 전략을 결합해 산업 경쟁력을 대폭 키워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미국, 소련과의 냉전 및 일본·독일과의 경제 전쟁서 승리
미국은 자국 국내총생산(GDP)의 50~70%가량에 달한 타국에 대해 공세를 펴서 패권 의지를 꺾고는 했다. 특히 이념이 다른 소련을 필사적으로 봉쇄해 1991년 말 붕괴시켰다. 미국은 1980년 전후에 소련에 대한 밀 수출을 동결해 식량난을 유도했으며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당시 상대편을 지원하고 ‘스타워즈’ 등 막대한 군비 경쟁을 유발했다. 이런 상황에서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수출품이던 유가가 급락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둘러싼 혼란이 겹치면서 소련은 해체됐다.
동맹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은 1985년 제조업 패권을 거머쥐려는 일본과 독일에 환율 절상 압력(플라자합의)을 가해 예봉을 꺾었다. 당시 ‘쌍둥이 적자(무역·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엔화를 2배 가까이 절상시켜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며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는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로 이어지며 ‘잃어버린 30년’의 단초가 됐다.
◇美,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저지 등 과기·산업 패권 전쟁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에 이어 2010년에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으며 2012년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공공연히 중국몽(夢)을 피력해왔다. 현재 중국의 GDP 규모는 미국의 70%가량인데 지하경제를 감안하면 양국 간 격차가 좁혀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은 2000년대 초부터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고,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대처하느라 국력을 낭비했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인공지능(AI)·빅데이터·우주개발 분야 등의 과학기술 파워와 첨단산업 경쟁력이 급부상했다.
결국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부가 중국 견제에 나섰고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무역 전쟁에 이어 과학기술 전쟁에 본격 돌입했다. 이어 조 바이든 정부는 중국에 대한 전방위적 옥죄기에 들어갔다. 트럼프 정부가 2019년 글로벌 통신장비 회사 화웨이를 시작으로 중국 첨단 기술 업체에 대한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인 게 단적인 사례다. 중국으로의 첨단 기술·인력 유출 방지 및 연구개발(R&D) 교류 확대 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무한프런티어법’을 통해 5년 동안 AI, 고성능 컴퓨팅, 양자정보 등 10대 기술에 12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상·하원도 미래 기술 개발을 위한 R&D에 5년 동안 최소 2,000억 달러를 투자하는 ‘혁신경쟁법’으로 이를 뒷받침하기로 했다. 반면 ‘국가 총동원 체제’에 나선 중국은 지난해 AI·양자정보·반도체 등 7대 과학기술 확보와 신소재 등 8대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 맞불을 놓고 있다. 중국은 2035년에 미국을 앞지른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美, 반도체 집중 봉쇄로 중국의 4차 산업혁명 가속 저지
미국의 견제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대표적인 반도체 업체인 칭화유니그룹은 파산 5개월여 만에 최근 국유화 절차를 밟고 있다. 지방정부에서 31조 원이나 투자 받은 우한홍신(HSMC)도 지난해 파산했다. 반도체 기술 진전이 없으면 6G로 넘어가기 힘들고 AI와 빅데이터 기술 실현 과정에서도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반도체 중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이어서 중국이 차량용 반도체나 스마트폰·TV용 반도체의 중저가 제품부터 공략할 수 있다. 실제 하이실리콘(반도체 설계)과 SMIC(파운드리) 등은 20~30%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차세대 기술이 출현하면 이전 세대 제품은 설 자리를 잃게 되므로 선도자가 아니면 생존하기 힘들다. 천세창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차관급)은 “미국이 한국·대만·일본·유럽 등과의 반도체 동맹에 대한 관리에 나서면서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격차를 좁히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반도체가 4차 산업혁명에 나선 중국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2020년 9%에서 2024년 17%로 늘어나면서 한국에 3%포인트 차로 근접할 것”이라며 중국의 부상 가능성에 경계심을 표시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최근 “중국이 10년 내 AI·5G·양자정보과학·반도체·바이오·그린에너지 등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도 심상치 않다.
◇中 논문·특허 비약적 양적 성장, 질적 성장은?
중국은 2008년에는 정보기술(IT) 분야의 세계 논문 수에서 12%로 미국(24%)의 절반에 그쳤으나 지금은 40%로 늘어 미국(15%)을 역전했다. 바이오·나노 분야의 흐름도 비슷하다. 특허 출원에서도 중국이 2010년 이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AI·빅데이터·양자기술·우주 등에서 미국에 못지않거나 근접한 힘을 축적한 데 이어 전기차·배터리 등 신산업을 주도하려 하고 있다. 이경무 서울대 AI대학원장은 “글로벌 학회지에 게재되는 중국의 논문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질적 성장도 담보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중국의 논문·특허 굴기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하나의 특허가 몇백 개의 특허를 대체할 수도 있는 3극특허(미국·일본·EU에 동시 출원·등록)가 중요한데 이 부분에서는 중국이 여전히 열악하다는 것이다. 천 옴부즈만은 “중국은 원천특허가 많은 3극특허가 부족하고 90% 이상 자국 위주 특허 출원으로 양적 성장에 치중해왔다”며 “미국의 과학기술력을 대체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도 “중국은 글로벌 학회지들을 대거 사들이며 자국의 논문을 많이 싣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첨단 굴기, “급브레이크 VS 추세 꺾이지 않을 것”
미국이 과학기술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첨단 굴기를 저지할 것이라는 지적과 중국의 R&D 발전 속도가 주춤할 수 있지만 이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엇갈린다. 천 옴부즈만은 “중국이 미국과의 과학기술 패권 전쟁에서 패하고 관치금융, 고령화, 저성장, 부채 급증 등을 관리하지 못하면 일본처럼 주저앉을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예측했다.
반면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미국이 제재 수위를 높여 중국의 과학기술·첨단산업 발전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 것”이라며 “다만 추세 자체를 꺾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우리도 과학기술 패권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국가적으로 파괴적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무환 포스텍 총장은 “포스텍을 벤치마킹해 2010년 설립한 중국 남방과기대가 2018년에 의대를 만들어 바이오헬스를 키우는 등 중국 대학들은 어마어마한 투자를 통해 무서울 정도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며 우리 대학의 환골탈태를 강조했다.
◇국가 R&D 대혁신으로 科技 경쟁력 퀀텀 점프해야
미중 과학기술 패권 전쟁 시대에 우리가 기술 주권 확립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천 옴부즈만은 “반도체 등 기술 초격차 분야는 아우토반을 달리게 하고, AI·자율주행차 등 뒤처진 분야는 추월 차선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차기 정부가 대·중기 상생, 스마트 공장, 서비스 산업 고도화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황 회장은 “2017년에 일본과 소재·부품·장비 전쟁을 벌인 우리는 미중 간 기술·산업 패권 전쟁 속에서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며 “우리가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학연정(産學硏政)이 함께 기술 혁신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총장은 “더욱 격렬해지는 미중 패권 전쟁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며 “우리만의 최고 기술로 무장해 미중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분야를 늘림으로써 패권국이 협력을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를 비롯해 2차전지·AI·양자기술·6G·로봇·수소 등과 탄소 중립 에너지, 바이오헬스, 우주·항공 등에서 산학연정이 합심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전략 기술 분야는 미국과의 협력을 동맹 수준으로 격상하되 중국과도 기업 차원의 협력은 늘려야 한다”며 “우리만의 초격차 전략 기술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여야를 떠나 냉철한 집단 지성을 결집해 과학기술, 미래 산업 경쟁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상욱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장(서울대 교수)은 “미국과 중국은 과학기술과 경제·안보 연계에 나서고 있다”며 “우리는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전략 기술 협력을 공고히 하면서 기술 주권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