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스포츠 라이프

버려진 머리카락 예술로 바꾼 ‘가위 손’

[대한민국 명장을 찾아서] 김진숙 한울이 미용실 대표

모발 이용해 꽃·장신구 등 제작

국내 처음으로 '헤어 아트' 개척

최근엔 광주대 석좌교수로 활동

英·美 등 해외서 얻은 기술·노하우

연구소 통해 후배들에게 무료 전수

마지막 꿈은 '미용 전수관' 설립

김진숙 한울이미용실 대표가 광주광역시 동명로 작업실에서 버려진 머리카락을 염색해 만든 헤어 아트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진숙 한울이미용실 대표가 광주광역시 동명로 작업실에서 버려진 머리카락을 염색해 만든 헤어 아트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원인 줄 알았다. 전시장 같기도 했다. 분명 간판은 ‘미용실’인데 머리를 할 수 있는 곳은 달랑 의자 두 개가 있는 작은 공간이 전부. 나머지는 온통 화려한 꽃들로 채워졌다. 한쪽 벽면은 꽃 그림 같은 작품들이 걸려 있고 다른 구석에는 비녀 같은 머리 장식물들이 배치돼 있다. 김진숙(68·사진) 한울이미용실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명 잘못 찾아온 줄 알았을 터다.



미용실에서 본 것들이 분명 진짜 꽃 아니면 평범한 조화라고 전혀 의심하지 않던 찰나 반전이 일어났다. 모두 머리카락이라고 한다. 꽃잎도, 줄기도, 나무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식물이 되고 꽃을 피울 줄 꿈에도 몰랐다.

김진숙 대표김진숙 대표


17일 광주광역시 동명로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미용실에서 50년간 가위를 잡으며 대한민국 미용 명장 1호 타이틀을 거머쥔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보다 국내에 ‘헤어 아트(the art of hair)’를 처음 도입한 개척자로 더 유명하다. 이 분야에 매달린 기간만 약 40년. 장신구 제조법 등 관련 특허 2건과 관련 교재는 그 결과물이다. 서울과 광주 등에서 전시회도 수차례 열었다.



처음부터 예술 작품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자르고 버려진 모발을 모아 탈색과 염색·코팅 과정을 거쳐 나뭇잎처럼 만든 뒤 손님에게 기념품으로 줬더니 반응이 꽤 좋았다”며 “이후 작품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어 화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연구를 해 이제는 거의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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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대표가 헤어 아트에 사용하기 위해 염색해 놓은 재료들을 소개하고 있다.김진숙 대표가 헤어 아트에 사용하기 위해 염색해 놓은 재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림이나 비녀 장식은 하나 만드는 데 1년이 더 걸린다. 습도에 약한 머리카락의 특성을 잘 모르고 스프레이로 작업을 하다 망치기도 여러 번. 결국 목공용 본드를 이용해야 습기에 강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만든 작품이 지금까지 약 100여 점에 달한다. 이 중에는 수천만 원에 팔린 것도 있다. 그가 “헤어 아트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되고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김 대표가 미용의 길에 들어선 것은 지난 1972년 금호미용고등기술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숱하게 고생을 했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일할 때 연탄가스에 중독됐음에도 쫓겨날까 봐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고 출근하기도 했다”며 “하도 많이 쓰러져서 ‘비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고 회고했다. 경진대회 입상으로 잡은 한 달간의 일본 유학 생활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김 대표는 “이전까지는 미용을 학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일본에서 구조와 원리를 배우면서 새롭게 눈을 떴다”며 “고객 관리에 대한 경험을 쌓은 것도 바로 이때”라고 덧붙였다. 1983년 전국대회 최우수상을 받은 후 얻은 뉴욕 콩쿠르 도전, 10여 년간 해외 아카데미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경험도 성장의 자양분 역할을 했다.

김진숙 대표가 비녀와 머리카락을 결합해 만든 '꽃비녀'를 들어 보이고 있다.김진숙 대표가 비녀와 머리카락을 결합해 만든 '꽃비녀'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해외에서의 경험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배들에게 제대로 된 미용 기술을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한울이연구소’를 만들어 20년 동안 해외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를 무료로 가르치고 영산대 초빙교수를 거쳐 지난해 광주대 뷰티미용학과 석좌교수로 활동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기능올림픽 미용 부문에서 금·은·동메달리스트들이 광주에서 대거 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김 대표는 요즘 일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고객을 받는 것은 기껏해야 하루 2명 정도. 대신 그동안 했던 일을 후배들이 더 잘해주기를 바란다. 지금은 광주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를 이어 미용 기술 전파에 매달리고 있는 딸 손진아(39) 씨에게 거는 기대도 있다. 그는 “지금은 트렌드와 스타일이 바뀌고 있는 시대”라며 “이제는 우리 같은 기성세대보다 기능올림픽을 새로 경험한 후배들이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다. ‘미용전수관’이 그것이다. 김 대표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미용 역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이를 통해 한국 미용의 뿌리를 찾으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송영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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