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의 위세가 시골 마을 낡은 담벼락까지 흔들던 시절, 목숨을 걸고 노동교화소를 탈출한 남자가 있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격변과 불안 속에 남자는 걷고 또 걷는다. 남루한 옷을 파고드는 거친 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며 광활한 사막을 건너 낯선 마을로 향한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다. 오래전 헤어진 딸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는 편지를 교화소에서 받은 후 그리운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위험한 여정에 올랐다. 딸이 등장하는 장면은 단 1초. 하지만 그에게는 1초가 영원보다 소중하다.
중국 영화계의 거장 장이머우 감독의 ‘원 세컨드(One Second)’가 27일 마침내 국내 개봉한다. 지난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황금곰상 부문에 초청됐지만 상영 직전 출품이 취소됐던 작품이다. 당시 영화제 측에 통보된 출품 취소 이유는 ‘기술적인 문제’였으나 영화계 안팎에서는 중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영화가 노골적으로 비판하진 않지만 중국 공산당의 흑역사인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년)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구시대 유물과 자본주의 산물의 동시 척결을 목표로 내세웠던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했고, 중국 인민들의 삶을 부조리 속으로 몰아넣었다. 영화의 주인공 장주성(장역) 역시 ‘싸움’ 때문에 노동교화소로 보내지고 가족이 해체됐지만 정확하게 어떤 ‘싸움’인지 영화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게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감독은 전작 ‘붉은 수수밭’ ‘인생’ ‘5일의 마중’ 등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초점은 시대가 아닌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 영화는 끝내 힘든 시절을 통과해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 자신의 삶 그 자체인 ‘영화’를 렌즈 삼아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눈물과 환희, 좌절과 감동의 순간을 포착해낸다.
작품 속에서 ‘영화’는 각 등장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이유로 소중하다. 장주성에겐 수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어떻게 자랐는지 알 수 없는 딸의 얼굴이 등장하는 1초가 가장 중요하다. 홀로 동생을 돌보는 가난한 소녀 류가녀(류호존)에게도 영화는 각별하다. 정확히는 영화 필름이 당장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절박하게 필요하다. 마을의 영사 기사 판(범위)에게는 영화 상영이 사는 이유 그 자체다. 마을 사람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혼란의 시대에 큰 낙이다. 마을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사 기사의 고압적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수행한다.
감독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를 갖기 위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문장 속 ‘영화’라는 단어는 ‘삶’으로 치환돼 이내 새로운 질문이 된다. ‘당신에게 삶이란 무엇입니까’. 러닝타임 102분,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