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D-33일이다. 선거 판세는 더 깊은 안갯속이다. 설 이후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박빙의 게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에선 절실한 쪽이 이긴다고 한다. 민주당은 정권을 빼앗기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위기감’으로 막판 지지층 총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반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왜 그런지 ‘자신감’에 푹 빠져 있다. 그는 설 연휴 첫날 윤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야권 후보 단일화 가능성에 대해 “설 연휴 전이 마지노선이었다”며 선을 그었다. “역대 단일화라는 건 보통 44일 정도 전에 된다”고 덧붙였다. “15% 득표율을 못 얻어도 돈을 날리는 것”이라며 안 후보 측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 대표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2002년 대선 승리를 가져온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는 선거 24일 전에 이뤄졌다. 이 대표가 선거 역동성을 무시하는 ‘웰빙 행태’를 보이니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한 것 아니냐는 쓴소리도 나온다.
그는 ‘정권 견제’라는 제1 야당 수장의 소명도 저버렸다. 이 대표처럼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는 제1 야당 당수 사례를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는 대선 후보 선출 후 두 차례나 무단 이탈했었다. 이 대표의 유아독존 행태를 보면서 ‘결국에는 품성(Character Above All)’이란 책을 떠올렸다. 로버트 윌슨이 엮은 이 책에서 전문가 10명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조지 부시까지 미국 대통령 10명을 분석한 뒤 지도자의 업적은 결국 품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 대표와 윤 후보 일부 측근들의 결정적 문제는 대선 승패뿐 아니라 ‘포스트 대선’ 정세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다는 점이다. 야권 연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로 뭉치는 범여권 세력의 아성을 뚫고 이기는 게 어렵다. 혹시 후보 단일화 없이 간발의 차로 승리하더라도 대선 이후 수많은 암초들을 헤치고 순항할 수 없다.
우선 현재 국회 전체 의석(295석) 중 민주당(172석) 등 범여권이 180여 석에 이르기 때문에 총리 임명 동의와 내각 구성이 표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06석의 국민의힘이 단독 집권할 경우 개혁 입법 추진과 정국 주도권 잡기가 불가능하다. 야권 대통합의 토대 위에서 승리해야 여권의 협력이나 내부 분열을 기대할 수 있다. 민주당은 총 15년간의 집권을 통해 대부분의 권력 기반을 장악했다. 입법부·사법부·헌법재판소·선거관리위원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지방 권력 대부분을 차지했고 방송·노조·시민단체·문화예술단체 등에 광범위한 우군을 형성했다. “야당이 이기더라도 달랑 청와대만 차지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 등 범진보 세력은 대선에서 질 경우 쉽게 물러서지 않고 대연합을 통해 6월 지방선거에서 역전을 노릴 것이다. 이어 정부의 실정과 보수 분열이란 틈새를 노려 대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인사 실패와 대통령 가족의 국정 개입 의혹 등이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한 전문가는 “만일 윤 후보가 야권 연대 없이 집권할 경우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의 광우병 사태 같은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기름을 부었다. 한때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해 정권 붕괴 위기까지 갔었다. 이 대통령이 대선에서 22%포인트 넘는 차로 압승했는데도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정권 반대 세력들은 나중에 허위로 판명된 광우병 소문까지 꺼내 선동했다”면서 “당시 이명박·박근혜가 힘을 모았다면 위기를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야권이 확실히 정권을 교체하고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나라의 미래를 열어 가려면 ‘소수파 집권’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보수·중도와 합리적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연합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범야권에서 ‘야권 통합, 정권 교체’란 슬로건이 번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