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주주의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괴롭혀온 제도적 불의를 고치며 모든 국민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해외 리더십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단순히 4년 전의 나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더 대담하고 더 야심 차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이 발표한 정강 정책(Platform)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주당이 왜 대통령 후보를 내고,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그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흔히 공약집으로 표현되는 총 90쪽짜리 민주당 정강 정책이 나온 때는 그해 8월. 대선 석 달 전이었다. 2016년 대선 때는 더 빨리 나왔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공약집을 내놓은 것은 선거를 무려 5개월 앞두고였다. 공화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는 47쪽짜리 공약집을 3개월 전에, 처음 대권에 도전했던 2016년에는 7월에 내놓았다.
공약집은 단순히 공약과 핵심 이슈에 대한 입장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일독하고 나면 정책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당과 대통령 후보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유권자들은 이 후보를 찍었을 때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리며 투표장으로 향할 수 있다.
공약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토론과 고민이 수반된다. 종종 대통령 후보와 당이 갈등을 겪는 모습도 보게 된다. 공약집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기록물로 완성되면 되돌릴 수 없는 불변의 조건이 된다. 선거가 끝났다고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공약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공약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불명예일 수밖에 없다. 다음 선거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공약집이 후보자와 정당으로 하여금 약속 이행을 강제하고 수권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도 대선이 한창이다. 공약이라고 하는 것들이 당에서, 대선 후보자들의 입에서 쏟아진다. 이상하다. 말로는 성찬이 차려졌는데 정작 문서로 작성된 공약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대선이 불과 29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도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다. ‘준비 중’이라는 말만 들릴 뿐이다. 청사진도 없고 우선순위도 알 수 없으니 우리나라 국민들로서는 한 달 뒤 ‘내가 살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선을 불과 11일 앞둔 4월 28일 공약집을 꺼냈다.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 후보보다 13일 빨리 내놓기는 했지는 선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약집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기에 일단 표가 될 수 있다면 현실성이 있든 없든, 당의 정체성과 맞든 안 맞든 던져 놓고 본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보다 반드시 최고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결과다.
온갖 발 없는 말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닌다. 경합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날뛰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여당 후보의 기본소득은 비만과 다이어트를 반복했고, 야당은 무덤 속에서 꺼냈다. 대권의 향배를 가를 것으로 예상되는 청년들에겐 더하다. 죽었던 사법시험이 되살아나고 집도 원가로 살 수 있다. 심지어 일하지 않아도 돈을 주겠다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무책임한 말잔치가 열리다 보니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은 단순화할 수밖에 없다. 누가 누가 더 비호감일까. ‘선거는 최선이 아닌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비아냥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30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공약집조차 내놓지 않는 것은 정치권의 책임 방기다. 유권자들은 앞으로 자신이 어떤 나라에서 살아가야 할지 알권리가 있다. 투표를 하고 싶다. 내게 공약집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