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선 후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아닌 ‘노무현’을 부르고 있습니다. 서거 10년도 더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향수를 자극하는 가 하면 울먹이고 눈물까지 흘립니다. 왠 호들갑인가 싶은데, 후보들 나름의 전략이 녹아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신뢰도 1위(한국갤럽 21년 10월 역대 대통령 공과평가 여론조사 61%‘잘한 일 많다’)를 기록중인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모습인데 득실은 좀 달라보입니다.
봉하에서 감정 흔들린 이재명 “참혹했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
우선 친노·친문의 온전한 지지가 더욱 절실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 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참혹했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참배에 앞서 노 전 대통령의 연대기를 들을 때부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가 하늘을 보는 등 감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초 성남 상대원 시장 연설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뒤 13일 만에 터트린 눈물이었습니다. 이 후보의 정신적 기둥이 ‘어머니와 노무현’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 이 후보는 사법연수원 시절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강의를 듣고 판검사의 길을 가지 않고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바 있습니다. 참배 뒤 즉석연설에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을 여러분도 기다리시느냐”며 “그러나 그 세상은 우리가 그냥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결국 운명은 여러분을 포함해 우리 국민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지지를 호소합니다.
그는 또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꿈은 노무현의 꿈이고 문재인의 꿈이고 이재명의 영원한 꿈이다”라며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증오나 갈등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함께 사는 세상,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향해 가는 세상, 과거와 정쟁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으로 가는 세상이 여러분의 도구로서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반칙과 특권 없는 사람 사는 세상, 이재명이 반드시 완수하겠다” 절절한 이 후보의 눈물호소에 아직까지 이 후보 지지에 머뭇거리는 친노·친문은 대거 결집하게 될까요. 이 후보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친노’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갈 수 있는 눈물이었을까요. 뜻밖에 여당 의원들 조차 이 후보의 눈물에 당혹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후보가 눈물 대신 실력과 유능함으로 무장한 자기 색깔로 반드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자신있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진보진영도 등돌린 노무현 ‘제주 해군기지’에 울컥한 윤석열
이보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한 이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였습니다. 이 후보보다 하루 앞서 지난 5일 윤 후보는 제주 해군기지가 있는 강정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다 울컥했습니다. 윤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진보 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군 기지를 건설한 데 대해 “고뇌와 결단을 가슴에 새긴다”며 보수 후보의 틀을 깨는 행보를 보여 더욱 눈길을 끌었습니다.
윤 후보는 “2007년 노 전 대통령께서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뇌에 찬 결단을 하셨다.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의 필수적 요소다. 무장과 평화가 함께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자주 국방과 평화의 서막을 연 것”이라고 노 전 대통령을 여러차례 추켜세웠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을 가슴에 새긴다”고 말하다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윤 후보의 눈물에 주목한 언론이 많았지만 핵심은 윤 후보가 서있었던 장소 바로 제주 해군지기입니다.
제주 해군기지가 있는 서귀포 강정(江汀). 노 전 대통령 임기동안 제주해군지기 설치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그곳에서 농성을 벌였던 이들은 보수시민단체가 아닌 진보시민단체와 노 전 대통령 지지층이었습니다. 강정은 중국 방공식별구역으로 한중간 배타적 경제수역 갈등이 있는 이어도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포항이나 진해가 아닌 강정에 해군기지가 있다는 점은 영유권 분쟁 관리에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오히려 친노들은 노 전 대통령의 유산에서 제주 해군기지를 지워버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출마 당시 “제주기지는 참여정부에서 결정했지만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 송구스런 심정”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김병준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제주 해군기지의 최종 결정자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섣불리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를 검토해보니 제주도 및 한반도 남동해안에 분쟁의 포커스가 맞춰졌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제주도에 군사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이었다(시사인2016년 인터뷰)”그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습니다.
이제 눈치채셨나요. 결집보다 무서운 분열의 소구력. 진보 진영에서 결코 반기지 않았던 제주해군기지에서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 한 윤 후보. 참여정부에 몸을 담았다가 국민의힘으로 옷을 바꿔입은 김병준 전 위원장을 지금 친노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볼 겁니다. 결국 윤 후보는 생각보다 많은 친노들을 흔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념과 진영에 갇히지 않은 노무현”안철수도 가세
사정이 이렇다보니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가세했습니다. 이 후보가 눈물을 보인 다음날인 7일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 회의에서 “오늘 아침에 국민께 어떤 말씀을 드릴까 생각하면서 문득, 차별과 배제와 싸우면서, 국민통합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과 정치역정이 생각났다”며 “노무현의 꿈이었고 우리 모두의 희망인 그런 나라, 저 안철수가 반드시 만들겠다”며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습니다. 안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외쳤고, 이념과 진영에 갇히지 않고 과학과 실용의 시대를 열고자 했다. 저 안철수가 가는 길과 같다”며 “당선되면 정파는 달라도 능력 있는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국민통합 내각을 만들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봉하에서 결집을 호소한 이재명·친노도 등돌린 제주해군기지에서 친노를 흔든 윤석열·질세라 노무현 계승을 외친 안철수. 여전히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친노는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