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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패권 시대 과학기술에 여야 없어…차기 정부, 과학·정치 상생 꾀해야” [청론직설]

◆신성철 전 카이스트 총장

[선도국 위한 K-방정식?]

기초과학→기술력→산업경쟁력→초일류국으로 도약

한국, 선진국 문턱서 성장·추락의 기로 ‘스톨 포인트’

科技 중심 국정운영, 산학연 장벽 제거로 선도국으로

연구개발 투자 효율화·기관장 장기 리더십 보장 필요

신성철 전 KAIST 총장이 9일 KAIST 도곡캠퍼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서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K방정식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신성철 전 KAIST 총장이 9일 KAIST 도곡캠퍼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서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K방정식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고광본 선임기자고광본 선임기자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쓰나미 속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리더에게 국가를 맡기면 무면허 운전사에게 차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성장이 둔화되고 정체되는 ‘스톨 포인트(stall point)’에 와 있는데, 과학기술에는 여야가 따로 없고 국민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성철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9일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권을 초월한 과학기술 장기 계획과 투자를 통해 초일류 과학기술 선도국이 돼야 한다”며 “차기 정권은 정치가 과학기술을 지배하려 들지 말고 양측의 상생을 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선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K방정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신 전 총장의 소신이다. 그는 “산학연, 민관정 간 높은 장벽을 허무는 게 중요하다”며 “미국이나 중국처럼 검증된 사람이 장기적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과학기술 중심 국가 경영이 차기 정권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과학기술은 국가의 생존 및 번영과 관련된 경제·안보·복지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국가 경쟁력은 산업 경쟁력에 있고 이것은 기초과학에 좌우된다. 동시에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중요하다. 스위스와 스웨덴 등의 주한 대사들도 ‘과학기술과 신뢰’를 성장과 도약의 핵심 축으로 꼽는다.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지만 성장이냐 추락이냐의 기로에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기술진흥계획을 수립한 지 60년이 됐다. 이제는 동남아·이슬람권·아프리카 국가 등이 한국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하지만 스톨 포인트에 있는 우리는 더 나아갈 수도, 갑자기 떨어질 수도 있다. 20~30년 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대에 진입한 국가 중 미국·독일·영국·스위스·스웨덴은 계속 성장세이지만 일본·프랑스·이탈리아는 3만 달러대에 머물러 있고 스페인은 외려 그 아래로 떨어졌다.

-혁신·협업·속도 등의 변수를 제대로 입력한 ‘K방정식’을 준비하자는 소신을 밝혀왔는데.

△과학기술 거버넌스 선진화와 기관장의 장기 리더십 확보, 감사 제도 선진화,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 순환 보직으로 담당 공무원이 너무 자주 바뀌는 문제도 혁파해야 한다. 교육 혁신, 실패를 용인하는 도전적 글로벌 연구 생태계, 대학과 출연 연구 기관의 기술 사업화 확대 등이 필요하다. 미국 대학의 로열티 수입을 보면 주로 바이오 의료 분야가 많은데 의과학자와 의공학자를 적극 키워야 한다. 대덕연구단지를 무인차·드론 등의 테스트베드용으로 쓰는 등 규제도 과감히 풀어야 기술 기반 창업을 가속화할 수 있다.



-바람직한 국가 연구개발(R&D) 혁신 방향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 대학들이 기업에 돌파구를 열 만한 기초연구 실적을 제시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미국과의 네트워크가 좋아 회사를 비싸게 매각하거나 나스닥 상장을 많이 하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 정부가 대학과 연구소의 기술을 글로벌 시장에 연결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교육, 연구, 기술 사업화의 3중나선 혁신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산학연, 민관정 간 협력도 절실하다. 독일 막스플랑크와 프라운호퍼 등은 대학과 가까운 위치에 연구소를 두고 인근에 있는 박사과정생들을 가르친다. 싱가포르 난양공대는 산학협력을 잘한다. 이제는 민간에서 계획을 세우고 관이 집행하고 정치권이 법안과 예산으로 뒷받침하는 쪽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정부의 R&D 투자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4.6%로 세계 1·2위 수준이지만 규모 면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5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그만큼 예산 집행의 효율화와 글로벌 파트너십 확산이 중요하다.

-과학기술 선도국이 되려면 원천 핵심 기술 확보와 고급 인재 육성이 필요한데.

△반도체, 철강, 자동차, 이동통신 기기 등의 생산기술은 매우 우수하지만 원천 핵심 기술의 수는 선도국의 60% 수준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 우리는 응용·개발 연구에 치중돼 있다. 우리 고유의 과학기술 장기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 미국의 인재 유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고급 두뇌 유치를 위해 ‘만인 계획’을 추진하는 중국은 선진국에서 받던 급여 외에도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할 뿐 아니라 처음에는 몇 개월씩만 체류해보라면서 유연하게 접근한다. 미국 역시 정교수가 A·B 대학에서 겸직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유연한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차기 대통령의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 의지가 중요한데.



△정치가 과학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과학에는 여야가 없다. 과학과 정치의 상생을 꾀해야 한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요즘 점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듯해 다행이다. 집권하면 과거처럼 과학기술 분야 주요 기관장을 물갈이해서는 안 된다. 정권에 상관없이 경험과 통찰력, 능력, 공익 마인드를 갖춘 사람들을 넓게 조사해 잘 선택한 뒤 장기 리더십을 보장해줘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캠프에 있거나 운으로 중요한 자리에 가면 국가도, 본인도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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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캠프나 자문 그룹에 ‘에이스’들이 참여해야 하는데.

△과학자는 정치권에 적극 자문하고 전략과 정책 논리를 정확하게 제공해야 한다. 단 반대급부를 얻으려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계가 정치권과 격의 없는 논의를 벌여 시너지를 증폭하는 관계로 가야 한다. 양쪽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지도자를 보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확실히 아는 듯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에릭 랜더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실장으로 선임하고 장관급으로 높였다. 랜더는 과거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8년 동안 과학기술자문위원장을 지낸 경험이 있다. 다만 그는 직원들을 괴롭혀왔다는 지적을 받고 최근 사임했다. 공학도인 시진핑 국가주석의 ‘기술 굴기’ 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리더와 정책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우리는 과학기술 분야 거버넌스 선진화가 필요한데.

△30여 명이 상근하는 ‘국가과학기술전략실’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도록 했으면 한다. 과학기술 분야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장 역시 검증된 리더가 장기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해줘야 한다. 과기정통부 장관의 임기는 보통 1~2년에 불과하다. 중장기 계획 수립은 고사하고 업무를 파악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출연연 원장들도 임기도 3년에 불과하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대학 혁신 마인드와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독일의 출연연은 지역사회에 안착해 대학·기업들과 협력을 잘하던데.

△막스플랑크와 프라운호퍼 등의 수장은 7년 임기를 두세 번씩 한다. 막스플랑크의 경우 전국적으로 50개 이상의 연구소를 운영하는데 새로운 양자 물질이나 나노 기술 등을 연구할 때 유럽이나 미국의 전문가를 영입해 재량권을 주고 예산을 지원한다. 우리는 출연연 분원이 전국에 100개가량 있지만 시너지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중국은 과학기술 분야의 장기 리더십을 중요하게 여기더라.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는 작지만 강한 대학인데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밀리컨이 2대 총장으로 24년간 재직했다. 16년 동안 스탠퍼드대 총장을 지낸 존 헤네시 알파벳 이사회 의장을 만나 “왜 총장을 그만뒀느냐”고 물으니 “스탠퍼드를 위해 더 할 일이 없어 그만뒀다”고 말하더라. 미국 아르곤연구소 등 국립연구소나 일본 이화학연구소 수장의 임기도 5년이지만 보통 그 이상 일한다. 중국의 연구소장은 아예 ‘임기가 없다’고 하더라. 공산당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 총장은 거의 단임으로 끝나지 않는가.

△4년이면 대부분 교체된다. 저는 이례적으로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을 연임해 6년을 한 뒤 KAIST 총장으로 갔지만 업무 파악에만 1년이 걸리더라. 싱가포르국립대, 싱가포르 난양공대, 홍콩과기대가 잘나가는 이유를 봐야 한다. 정부가 예산의 70%를 지원하지만 학교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검증된 총장을 뽑아 5년을 시킨 뒤 대과가 없으면 5년을 더 하도록 한다. 우리도 총장이 3년 정도 일한 뒤 내외부로 구성된 평가위원회에서 합격점을 받으면 4년을 더 보장해야 한다. 지금은 총장이 사전에 내정돼 이사회에서 형식적으로 투표를 거쳐 통과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사립대 이사회는 성공한 동창 기업인 등 대학을 아끼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모던 샤피로 총장은 12년째 재임 중인데 기부금을 무려 6조 원이나 거뒀다. 이사 30명 중 3분의 1을 기업인으로 위촉해 이들이 기부금도 내고 기부자도 연결하도록 했다. 우리는 이사회에 기업인을 모시려고 해도 “왜 아까운 시간에 거수기나 하느냐”는 등의 반응을 보이더라.

-과학기술 감사 제도의 선진화도 필요한데.

△비리 척결을 위한 감사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미리 시나리오를 잡고 몰아가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찍어내기’나 ‘표적 감사’를 당하면 해당 과학자만 의욕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과학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저도 DGIST 총장 시절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와 공동 연구를 하며 부당한 연구비를 지급했다는 혐의로 2018년 정부에서 고발한 적이 있다. 국내외 과학계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검찰이 불기소하면서 명예를 회복했지만 타격이 컸다. 창의적·혁신적·도전적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현재 정부 R&D 과제의 성공률이 98%에 이르는 것은 실패를 많이 하면 감사를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려 ‘성실 실패’와 ‘도전적 실패’를 수용해야 한다. 대학과 출연연도 연구 윤리를 더 강화하고 스탠퍼드대처럼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는 문화를 길러야 한다.

He is…

1952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대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물리학 석사 학위,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재료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이스트만코닥연구소 수석연구원에 이어 1989년부터 KAIST 물리학과 교수, 석좌교수로서 80여 명의 석·박사와 박사후연구원을 양성했다. 나노자성체의 자구역전 동력학인 ‘나노스핀닉스’ 분야를 개척했다.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대한민국 학술원상,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한국인 최초 아시아자성학회상 등을 받았다. 과거 DGIST 1~2대 총장, KAIST 최초 동문 총장으로서 교육과 연구 혁신을 꾀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세계경제포럼 4차산업혁명센터 자문위원 등을 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미국물리학회 석학회원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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