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왕건이 풍수지리만 믿고 '개경 천도' 하진 않았다"

■개경

박종진 지음, 눌와 펴냄





918년 철원에서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919년 송악, 즉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건국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천도를 감행한 이유는 뭘까? 궁예가 세운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에는 왕건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잔존했다. 민심 수습을 위해서라도 쇄신이 절박했다. 왕건의 천도대상지 1순위는 개경이 아닌 서경(평양)이었다. 고려와 그 수도 개경연구에 관한 최고 수준의 권위자 박종진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왕건에게 “서경은 이상이고 개경은 현실이었다”라며 “개경은 왕건 세력의 근거지였고, 궁예 시절 한때 수도였기에 성곽이나 주요 기반시설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개경은 우리 역사에서 풍수지리적 요인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지만 이 같은 현실성도 두루 고려됐고 오히려 “풍수지리는 개경 천도 이후 수도의 지위를 정당화 하는 과정에서 강조”됐다. 박종진 교수의 신간 ‘개경’은 400년간 고려의 수도였음에도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도시 개성의 특성과 변화상을 체계적으로 나눠 알기 쉽게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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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주산은 송악산이고, 그 남쪽 만월대가 조선 한양의 경복궁 격인 고려 궁궐 자리다. 개경의 궁궐은 가장 안쪽의 궁성과 그 바깥을 감싼 황성, 송악산과 용수산 등의 능선을 따라 쌓은 나성까지 ‘삼중구조’로 이뤄졌다.

불교가 국교이던 개경에는 이름난 절만 300개 이상, 확인되지 않는 사찰도 100개가 넘는다. 저자는 “개경의 절은 종교적 기능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으로 중요했다”면서 “길목에 자리 잡은 절들은 개경 안팎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 됐다”고 분석했다. 교역과 상업이 발달한 개경 곳곳에는 시장도 많았다. 기둥이 1000개가 넘는 대규모 행랑을 거느린 시장이 도심 한복판에 있었고 말 시장 ‘마시’, 돼지시장 ‘돈시’, 종이시장 ‘저시’, 기름시장 ‘유시’ 등이 있었다.

그 옛날 개경 모습을 한양과 비교하며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저자는 “개경의 도성 형태, 궁궐·관청·시장 위치는 한양에 큰 영향을 줬다”면서 “조선의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지면서 개성은 지방도시가 됐지만, 한양을 보좌하는 중요한 배후도시의 위상을 유지했다”고 설명한다.

개경의 고려 궁궐은 수차례 변란을 겪으며 파괴와 재건을 반복했고, 한양 천도 이후 폐허가 된 책 땅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특히 북한 땅에 있다는 이유로 연구 목적의 접근도 쉽지 않았기에 1990년대부터 고려사 연구가 진척됐고, 2007년부터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시작됐으나 현재는 남북 경색으로 중단 상태다. 저자는 고려사 연구자로서 수차례 개경을 다녀왔고, 직접 답사하며 찍은 사진들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지도들이 책에 함께 담겼다. 2만4000원.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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