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사라졌던 18세기 청화백자묘지, 美 미술관서 귀환

조선후기 무신 이기하 무덤 부장품

1994년 이장 후 분실…美미술관에 기증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확인해 귀환 성사

18세기 상류층 추모관행 확인 등 가치 높아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유물은 1994년 이장 이후 분실됐고 미술관 측은 1998년에 기증받은 소장품을 원소장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유물은 1994년 이장 이후 분실됐고 미술관 측은 1998년에 기증받은 소장품을 원소장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라진지 30년 가까이 되도록 행방을 몰랐던 18세기 무덤의 부장품 ‘묘지(墓誌)’가 미국 유명 미술관 소장품으로 확인돼 고국의 문중 품으로 되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소장하던 ‘백자청화이기하묘지(白磁靑畵李基夏墓誌)’ 18점이 지난 8일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10일 밝혔다.

묘비에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듯 조선시대에는 ‘묘지’를 적어 무덤에 함께 매장했다. 고인의 업적을 돌이나 도판에 기록한 ‘묘지’는 지석(誌石) 또는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불린다. 무덤 안에 관과 함께 묘지를 매장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추모 관행이었다.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유물은 1994년 이장 이후 분실됐고 미술관 측은 1998년에 기증받은 소장품을 원소장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유물은 1994년 이장 이후 분실됐고 미술관 측은 1998년에 기증받은 소장품을 원소장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잃어버린 묘지…어떻게 돌아왔나


이번 ‘백자청화이기하묘지’의 귀환은 해외기관에서 소장하던 묘지를 한국으로 돌려보내 준 첫 사례가 됐다.

이 묘지는 조선 후기 훈련대장과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이기하(1646~1718)를 추모하는 기록이다. 직사각형 판형의 도자에 청화안료로 글을 적은 것이 총 18장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 2015~2016년 진행한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 한국문화재 실태조사에서 이 묘지를 확인했다. 이에 대한 보고서 발간을 준비하던 2020년에 재단 측은 묘지의 원 소장자가 한산 이씨(韓山李氏) 문중임을 알게돼 문중에 알렸다.



이기하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시흥군 향토유적으로 1988년부터 지정 관리되다가 1994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장했다. 당시 묘지는 이장한 묘에 함께 묻지 않고 문중의 원로가 보관하던 중 분실됐다. 행방이 묘연한 묘지는 1998년 클리블랜드미술관에 기증됐다. 미술관은 2020년 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문중의 연락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분실물’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문중 대표 이한석 씨는 이에 대한 대응을 재단에 위임했고, 미술관은 재단과의 협의를 통해 본래 이기하 묘소에 묻혀있던 ‘백자청화이기하묘지’를 한국에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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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부장품, 사찰 봉안물 등 출처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유물은 본래 소장처로 돌려보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은 국제박물관회의(ICOM)가 윤리강령으로 권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사례는 많지 않으나 이번 클리블랜드미술관의 반환은 윤리적 실천의 좋은 사례가 될 전망이다.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윌리엄 그리스워드 클리블랜드미술관 관장은 “우리는 한국의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한 오랜 협력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재단으로부터 사안을 접한 후 올바른 결과를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중요한 문제를 처리한 클리블랜드미술관의 전문가답고 사려 깊은 방식에 깊은 감사를 한다”고 말했다.

■돌려받은 묘지 18장의 가치


이기하는 조선후기에 훈련대장과 총융사 등을 역임한 무관이며, 별세 후 ‘정희(貞僖)’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묘지에는 이기하를 추모하는 내용과 함께 가족사, 정치적 업적이 적혀 있다. ‘백자청화이기하묘지’의 글은 조선시대 이조좌랑을 역임한 문신(文臣) 이덕수(1673~1744)가 쓴 것이며, 그의 문집 ‘서당사재(西堂私載)’에도 수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백토를 직사각형 판형으로 구워 만든 18매의 묘지에는 청화 안료로 글씨가 쓰였다. 판의 우측에 묘주의 관직·이름이 적혀 있다. 18매 중 몇 번째인지도 쓰여 있어 18장이 온전한 한 세트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장에 적힌 문구를 통해 이 묘지가 1734년에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의 업적과 가족사를 백자 도자기에 청화안료로 정성껏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청화백자 이기하 묘지' 총 18장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장에 적힌 문구를 통해 이 묘지가 1734년에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묘지 말미에는 ‘숭정(崇禎) 갑신 후 91년 갑인(1734년·영조10) 8월 일 구워 묻다’라고 쓰여있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지석이 18세기 조선 상층부를 중심으로 제작된 백자 지석의 전형적인 사례임을 알 수 있다. 재단 측 관계자는 “장방형의 백자 지석은 18∼19세기 이후 규격화됐고, 왕실과 사대부 계층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지석에 청화로 필사한 지문을 사용했다”면서 “색조가 안정된 우수한 청화 안료를 사용한 지석들은 아마도 관요였던 분원(分院)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석처럼 단정한 해서체로 필사한 것 역시 이 시기 지석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클리블랜드미술관으로부터 묘지를 돌려받은 이한석씨는 현재 이기하 선생의 묘소가 충남에 있는 것을 고려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산하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연구원 측은 지난달부터 박물관에 전담부서를 설치했고, 충남 국외소재 문화유산의 조사 및 교류협력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에 돌아온 이기하 묘지는 오는 4월께 기증행사와 특별전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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