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미궁 감옥에 갇힌 이카로스는 새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함께 감옥을 탈출한다. 이카로스는 새처럼 날아오른 것이 신기했던 나머지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 채 너무 높게 날아올랐고,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날개의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만다. 이 신화를 통해 이카로스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욕망과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16일간의 대장정을 뒤로하고 지난 20일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에서 단연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바로 러시아 피겨 스케이팅 선수 카밀라 발리예바의 도핑 양성 사건이다. 15세의 어린 선수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에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발리예바는 피겨 여자 싱글 종목 금메달이 유력한 선수였다. 여성 선수로는 해내기 힘든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무기로 주니어 데뷔 이후 올림픽 직전까지 출전한 모든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해왔기에 언제부터 도핑이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러시아 선수들은 지난 2015년 국가 주도 도핑 사건이 밝혀진 이후 자국 이름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또다시 도핑 사건이 터져버리자 전 세계 스포츠 팬들의 분노는 매우 커졌다. 도핑 적발 후에도 아랑곳 않고 도핑을 했다는 것은 스포츠 팬들은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 전체를 기만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으로 지난 2017년 공개된 미국의 다큐멘터리 ‘이카로스’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카로스(ICARUS)'의 브라이언 포겔 감독은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 우승자인 랜스 암스트롱이 지난 2012년 도핑에 적발된 사건에 주목하며 촬영을 시작한다. 암스트롱은 적발 전까지 6년간 매년 150번의 약물 검사에도 한 번도 양성이 나오지 않았었다. 이에 브라이언은 도핑을 피해 갈 수 있는 시스템적 결함이 있다고 보고, 직접 자신의 몸에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한다. 실험은 모스크바 반도핑 연구소 그리고리 로드첸코프 소장이 돕는다. 브라이언은 5개월간 로드첸코프와 도핑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그 과정을 촬영했고 도핑 효과 비교를 위해 아마추어 사이클 대회인 '오트 루트'에 출전하기도 한다.
단지 '도핑 실험'으로 시작된 다큐멘터리는 뜻밖의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며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으로 흘러간다. 독일 ARD 방송국이 러시아의 조직적 도핑 의혹을 제기하며 여기에 로드첸코프가 연루됐다고 보도한 것. ARD 다큐멘터리에는 러시아 내부고발자들이 출연해 "러시아의 모든 선수가 약물을 복용한다. 그리고리 로드첸코프 아래에 있는 선수들은 양성반응이 나오지 않는다"고 폭로했다.
세계반도핑기구(WADA) 회장은 해당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사건 조사를 위한 독립위원회를 조직했다. 로드첸코프는 러시아 반도핑 연구소장을 사임한 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미국으로 탈출해 브라이언과 함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로드첸코프의 연구실 동료였던 니키타 카마예프 러시아 반도핑기구 회장의 의문사 소식이 들려온다. 두려움을 느낀 로드첸코프는 '뉴욕타임스'에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러시아의 도핑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낱낱이 털어놓게 된다.
작품은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과정을 매끄럽게 잘 담아냈다. 가벼운 궁금증에서 시작한 다큐가 국가 주도적 도핑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담아내게 된 전개가 마치 짜여진 극본 같아 놀라움을 자아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현실에는 영화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알고 보기 시작했음에도 픽션 영화처럼 느껴진다.
러시아의 도핑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오랜 시간 이어져온 것들이었다. 이들은 금지 약물과 술을 섞은 '칵테일'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투여했고 러시아 연방보안국(구 KGB)의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적극적인 협력으로 소변 샘플을 바꿔치기하기도 했다.
도핑은 가장 공정해야 할 스포츠 종목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스포츠의 매력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인데, 도핑을 하게 되면 이미 결과가 정해진 게임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똑같은 조건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야 할 운동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출발선을 한참 앞당겨 대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선은 미래의 건강을 담보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도핑을 하게 되면 선수들의 건강은 빠르게 망가질 수밖에 없다. 이카로스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욕심으로 날개를 잃고 추락했듯 말이다.
올림픽은 폐막 이후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이쯤에서 영화에서 인용됐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구절을 남겨본다. "모두가 거짓을 수용하면 거짓은 역사의 일부가 되어 진실이 된다."
◆시식평 - 잊으면 또 발생하게 될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