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경기 영상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인 비프로컴퍼니가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플립(Flip)’을 추진한다. 고객층이 두터운 해외 시장 점유율 확대와 추가 투자를 쉽게 유치하려는 포석으로 알려졌지만 창업 초기 정책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은 유망 스타트업의 한국 탈출이 최근 잇따라 업계에 적잖은 시사점을 던진다는 분석이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규제 회피와 유리한 투자 유치 조건 등을 겨냥해 본사 해외 이전에 나서는 사례가 늘자 일각에서는 우수 인력 유출과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훼손 우려 목소리가 크다. 스타트업 붐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규제 등 창업 친화적 제도 정비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비프로컴퍼니는 최근 투자자들에 본사를 영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 본사를 영국으로 옮기게 되면 통상 국내 법인은 영국에 새로 설립하는 법인의 100% 자회사가 된다.
이에 따라 창업자와 투자자 등 한국 법인의 주주는 영국 법인에 주식을 넘기는 대신 현지에서 발행하는 주식을 받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은 국내 세법에 따라 주식 양도로 분류돼 플립에 동의한 창업자와 투자자는 양도소득세를 내야하기 때문에 플립을 하려는 창업자는 투자자에 이를 사전에 알리고 동참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2015년 출범한 비프로컴퍼니는 2020년 6월 시리즈C 단계에 119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등 최근까지 총 223억 원의 투자금을 받았다. 알토스벤처스·소프트뱅크벤처스·새한창업투자·스프링캠프·미래에셋벤처투자·KT인베스트먼트 등이 주요 투자사다. 시장에서 최근 거론되는 회사 가치는 1500억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비프로컴퍼니의 핵심 서비스인 비프로일레븐은 크게 영상 촬영 및 편집, 데이터 분석, 정보 공유 플랫폼 등 3가지로 구성돼 있다. 운동장에 설치한 카메라로 경기, 훈련 모습을 촬영해 코치진에게 실시간으로 영상을 제공한다. 특히 3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수들의 움직임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비프로컴퍼니는 창업 초기에는 K리그와 유소년축구단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국내 시장 규모로는 수익을 내기가 어려웠다. 회사측은 이에 2017년부터 유럽에 진출한 국내 선수들을 통해 우선 독일 프로축구 리그에 진출했다. 독일은 1부에서 5부 리그까지 389개의 구단이 있고, 1부 리그를 제외하면 이전까지 AI영상 분석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프로 입장에선 국내보다 시장이 훨씬 컸다.
비프로컴퍼니는 고객사 요청에 따라 상품을 구성하고 서비스를 개발하는데 이들과 접점을 늘리고 해외 투자 유치 기회를 얻기 위해 본사 이전을 선택했다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소니가 전략적 투자자로 나서 추가 투자를 논의 중이다.
앞서 유니콘(기업 가치 1조 원 이상)에 등극한 AI 교육서비스 기업 뤼이드는 소프트뱅크 등 주요 투자자가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분 20%를 보유한 소프트뱅크는 약 250억 원의 양도세를 부담하게 되지만 뤼이드의 미국 이전으로 기업가치가 급속히 확대돼 더 큰 수익을 기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최근 들어 초기 스타트업들도 해외 투자 유치, 시장 확대를 위해 플립을 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협업 툴 개발 스타트업 스윗(Swit)은 미국 시장이 핵심이라 지난해 중순 본사를 아예 미국으로 이전했다. 이전에도 본사 역할을 하던 곳은 미국이었지만 법상 본사 위치도 바꾼 것이다. 이밖에 ‘비건화장품’ 스타트업 멜릭서도 해외 투자를 염두하고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지난해 말 200억원 규모 투자를 받은 데이터 관리 스타트업 쿼리파이도 최근 미국으로 플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유망 스타트업들이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이유로 규제 회피와 투자자 요구 등을 꼽고 있다. 원격의료 분야 스타트업의 경우 국내에만 존재하는 규제가 많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아예 본사를 해외로 옮기려는 곳들이 적지 않다. 해외 투자자들이 투자 선결 조건으로 본사를 한국이 아닌 미국 등 특정 지역으로 제한해, VC 투자 유치를 위해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사례도 많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스타트업이나 벤처 기업의 성장을 위한 해외 시장 확대에 본사 이전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적잖아 국내 잔류를 강요할 수 만은 없지만 ‘플립’에 대한 당국의 종합적인 대응책은 마련돼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