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 악화에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이 비상 비축유 6000만 배럴을 방출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1일(현지 시간) 전해지자 한때 전날 대비 11%까지 폭등하며 배럴당 106달러를 넘어섰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상승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IEA가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한 것은 지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 정부도 에너지 수급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비축유 방출에 동참한다.
하지만 11년 만의 비축유 방출도 급등하는 유가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이날 WTI는 결국 8% 오른 배럴당 103.41달러에 마감했다. 밥 요거 미즈호증권 선물 사업부 디렉터는 “6000만 배럴은 시장을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러시아의 공급 차질 가능성을 고려하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국제 유가 급등에 따른 물가 상승과 글로벌 교역 악화에 따른 경기 침체가 맞물려 세계경제가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 속에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느려질 것이라는 전망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다.
월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에 당황한 러시아가 공격 수위를 높이면서 미국과 서방의 제재도 같이 세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국과 유럽은 국제금융통신망(SWIFT·스위프트)에서 러시아를 퇴출하고 셸 등 메이저 석유 업체들이 러시아 시장에서 속속 철수 결정을 내리는 등 하루가 멀다하고 러시아 경제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이렇다 보니 다음 단계로 러시아 에너지 수출 제재가 가능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워싱턴 안팎에서는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을 막아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길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미 캐나다는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에너지 가격과 인플레이션 폭등을 우려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제재에는 소극적이지만 분위기가 급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비축유 방출에 이어 가스 등의 다른 에너지원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와 공조하겠다는 입장이다.
민간 차원에서도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가 늘고 있다. 핀란드 네스테와 스웨덴 프림 같은 유럽 정유 업체는 자체적으로 러시아산 수입을 중단했다. 최근 유가가 급등하는 것도 이 같은 흐름이 작용한 결과다. 러시아는 글로벌 석유 생산의 12.6%, 천연가스의 17%가량을 차지하고 하루에만 400~5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는 원유 수출 대국으로 일부 차질에도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6000만 배럴의 긴급 방출 규모도 러시아의 수출량을 감안하면 12일치를 대체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수출국이 증산을 할 수 있지만 단기간에 러시아 물량을 대체하기 힘들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만 해도 아직 증산 관련 신호를 주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돌파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여기에 세계적인 곡물 산지인 우크라이나가 전화에 휩싸이면서 국제 곡물 가격도 연일 상승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세계경제를 덮칠 가능성에 점차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그룹 페드워치 집계에서 연준이 3월 중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는 ‘빅 스텝’에 대한 가능성이 지난달 초 90% 이상에서 한 달 만에 5% 미만으로 급락한 것은 이러한 시장 분위기를 반영한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선임고문은 “지금 상황은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강화하고 있다”며 “시장이 올해 연준의 금리 인상 횟수 전망을 낮춘 것은 인플레이션 예상치가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채권 시장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날 1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 현상과 유가 급등에 따른 경기 둔화 전망이 겹쳐 한때 연 1.72%대로 급락했다. 하루 전만 해도 10년물 금리는 1.85%대를 오르내렸다. 다이앤 스웡크 그랜트 손턴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현 상황은 연준에 악몽 같을 것”이라며 “외부 요소인 유가 급등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긴 1970년대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이런 요인을 감안하면 얼마 전까지도 ‘매파’ 시그널을 보냈던 연준이 신중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당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겠지만 유가 상승과 우크라이나 사태가 가져올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월가에서는 이달 0.25%포인트의 기준금리 인상은 확정적이지만 연준이 긴축을 서두르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크리슈나 구하 에버코어 ISI 부회장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추가적인 도전이라는 점을 파월이 인정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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