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꽂이] '페르소나 공간' 더현대 서울, 쇼핑 성지가 되다

■더현대 서울 인사이트

김난도·최지혜·이수진·이향은 지음, 다산북스 펴냄

꼰대브랜드 과감히 없애고

유리 천창·5층은 정원 조성

MZ 그들만의 '놀이터'로

백화점 무덤 여의도서 성공





명품 브랜드 프라다를 선호하는 ‘페르소나A’는 검은색과 스키니룩을 좋아한다. 차보다 바이크를 타는 게 더 멋지다고 여긴다. 보테가 베네타를 즐겨 사용하는 ‘페르소나B’는 매사에 진지하고 예민하며 향수에 집착하고 자아가 뚜렷하다. 가성비보다 브랜드 스토리를 더 따진다. 차분한 도시남성으로 분류되는 ‘페르소나C’는 확신에 찬 눈빛을 가졌으며, 모험을 좋아한다. 선호 브랜드는 펜디. 색깔은 원색, 디자인은 미니멀을 추구하는 ‘페르소나D’는 내향적이고 향초를 피우며 파리지앵을 꿈꾼다. 발렌티노 스타일의 ‘페르소나E’는 패션의 정석보다 믹스매치를 좋아하고 과감한 도전을 두려워 않는데 의외로 한식을 찾는다.



섬세한 취향이 제각각인 이들 고객을 단숨에 끌어당긴 곳이 있다. 백화점 필패(必敗) 지역이라는 여의도에, 코로나19로 외출 의지와 소비 심리가 최악이던 지난해 2월 문 연 ‘더현대 서울’이다. 이름도 이상했다. 통상 백화점은 ‘무슨 백화점 어디점’ 식으로 작명하는 것 아닌가. 그 이상한 기발함이 ‘파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반격이 시작된다. 백화점 매출의 승부처라는 3대 명품 브랜드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하나 없이 개장했지만 한 달 만에 매출 1000억원, 1년 만에 목표치를 30% 초과 달성해 매출 8000억원을 넘겼다. 소비경향을 분석한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의 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연구진은 신간 ‘더현대 서울 인사이트’에서 이 같은 성공의 비결을 ‘페르소나 공간’에서 찾는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칭하는 ‘페르소나’를 심리학 용어로 끌어들였다. 인간이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바꿔가며 살아간다고 분석했다. 현대인의 경우 다양한 SNS로 자기표현의 경로가 많아지면서 같은 SNS 안에서도 여러 계정을 운영할 정도로 여러 페르소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됐다. 저자는 “이러한 ‘유연한 자아(flexible self)’의 시대에 사람들은 혈연·학연·지연 같은 일차적 관계보다 ‘취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게 된다”면서 “취향은 단순히 즐기는 취미의 차원이 아니라, 소통과 소속의 욕구를 실현하는 정체성 의식 형성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백화점의 미래가 럭셔리에 달려있다고 한다면 ‘멀티 페르소나’ 시대의 럭셔리란 비싼 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확고한 취향’인 셈이다.



더현대 서울의 경우 지난 2015년 백화점 개점을 기획하면서 ‘고객 페르소나’를 9가지 유형으로 규정했다. 앞서 본 페르소나들이 그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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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극도로 세분화되는 현대 시장에서 타깃 고객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획자나 마케터가 더 분명하게 고객에게 접근할 수 있게 도화주는 것이 바로 ‘고객 페르소나’다. 공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 방문하도록 유도할 것인가?’라는 타깃 설정의 문제가 기획의 출발점이 된다…사람들이 열망하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깃 고객의 페르소나에 부합하고, 그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공간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공간’, 바로 페르소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공략 대상으로 우선 설정한 타깃층은 ‘MZ세대’였다. MZ세대가 주로 진입하는 지하철 통로와 연결되는 지하2층은 그들만의 놀이터가 되어야 했다. 지하2층은 “임원이 모르는 브랜드로만 채우라”는 특명이 내려진 이유다. 임원이 알 정도인 브랜드라면 이미 ‘꼰대브랜드’라는 얘기다. 더현대 서울은 단숨에 전국 MZ세대의 데이트코스가 됐다. 개장 초 SNS에 하루 3000건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원거리 매출 비중은 76%였는데, 경기 지역 고객이 26%, 대구·부산 등 지역 고객은 50%에 달했다.

공간 구성에서도 한국의 백화점다움을 모두 버렸다. 기존 백화점은 고객의 시선을 상품에 고정시키고자 폐쇄적 공간을 추구했다. 동선도 오로지 구매 위주였다. 더현대 서울은 투명한 유리로 천창(天窓)을 만들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그 비싼 땅에 5층은 거의 전체를 정원으로 조성했다. 3400평 규모의 실내정원을 만들고자 약 170개 매장과 2000억원 매출을 포기했다. 기둥없이 탁 트인 실내정원 ‘사운즈 포레스트’와 지상 2층부터 지하1층까지 관통하는 인공폭포 등은 안(內)이지만 바깥(外)을 느낄 수 있는 ‘환상의 공간’이다. 백화점에 ‘빈 공간’이라니. 그러나 책은 “여백이 있어야 고객이 자기 페르소나를 투영할 여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라며 자기 정체성을 투사해 가슴 설레고 또 가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현대 서울의 사례를 비단 백화점 한 곳의 성공신화로 봐서는 안 된다. 책은 디지털 대전환의 시기,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뒤엉킨 ‘뉴리테일’ 시대에 맞는 공간의 진화와 생존전략을 찾아내 분석했다. 정체성에 대한 규정 방식이 달라진 현대사회를 꿰뚫어 본 저자 김난도 교수는 “항상 접속 가능한 다양한 매체에서 ‘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가 소비를 포함한 모든 일상의 관건”이라며 “온라인 채널이 편리함과 저렴함을 무기로 필요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면, 오프라인 공간은 경험과 재미를 통해 정체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에 없이 새로운, 환상 그너머의 오직 거기에서만 존재하는, 취향으로 소통하며 기술을 입혀 ‘페르소나 공간’으로 진화하라.” 1만8000원.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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