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뒷북경제] 스태그플레이션 공포를 아는 한은의 심상찮은 물가 경고

물가 전망치 3.1%로 높이고 상방 압력 경고

슬로플레이션 지나 스태그플레이션 진입 단계

한은, 글로벌 경기 회복에 스태그 아니라 판단

총재 공석 우려에도 기준금리 인상 필요성 강조





매사 신중한 한국은행이 최근 내놓는 물가 진단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 10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수차례에 걸쳐 물가 상승 압력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 경고한 것입니다. 그동안 신중하게 접근했던 임금·물가 악순환 발생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지난달엔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상회할 것이라며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0%에서 3.1%로 1.1%포인트나 올려 잡았습니다. 시장에서는 물가가 통화정책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실제로 물가는 우려할 만한 수준입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개월째 3%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글로벌 교역 악화와 국제유가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경기는 둔화하고 물가는 더 오를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우리 경제가 이미 ‘슬로플레이션(slowflation)’을 지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진단마저 나옵니다. 슬로플레이션은 경기 둔화 상태에서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으로 경기가 침체 단계까지 진입하는 스태그플레이션보다 강도는 낮지만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이 동반 상승해 경제적 고통은 확대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군 포격에 초토화된 우크라 마리우폴 거리 /연합뉴스러시아군 포격에 초토화된 우크라 마리우폴 거리 /연합뉴스


한은 역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경기 하방 요인인 동시에 물가 상방 요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제유가가 많이 오른 데다 환율도 오르고 있는 만큼 성장과 물가에 상당한 파급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러시아 디폴트(채무불이행)가 현실화될 경우 직접적인 영향은 없더라도 유럽 시장에 충격을 주면서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수출을 포함한 실물 경제까지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경기는 꺾이는데 물가만 오르는 것은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 전조 현상입니다. 하지만 한은은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미국 등 세계 경제가 양호한 회복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물가 상승 압력은 커졌어도 경기 침체가 같이 오는 현상은 아닐 것”이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굉장한 충격을 준다면 세계 경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아직 스태그플레이션까진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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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수출 호조가 이어지고 민간소비 회복세도 기대되는 만큼 경기 침체까지 생각할 단계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인 오일쇼크로 우리나라는 1980년 물가가 28.7% 오르고 성장률은 -1.6%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은이 스태그플레이션 진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만큼 두려운 현상인 것을 알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는 모습. /연합뉴스서울 시내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는 모습. /연합뉴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침체를 뜻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더해 만든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좋아 소비가 늘면서 물가가 오르지만 경기가 나쁘면 소비가 줄어 물가가 떨어집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가 나빠지는데 물가도 오르는 예외적인 현상인 셈입니다. 통상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경우 발생합니다. 경기는 좋지 않은데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에 제품가격을 올리면 소비가 이뤄지지 않아 기업 수익이 감소하고 침체로 이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경제학계에서도 스태그플레이션을 ‘난치병’으로 부를 정도로 대응하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리면 돈이 풀리면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면 경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급증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물가와 실업률은 동반 상승하며 서민 생활을 짓누르게 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전예방뿐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 사진제공=한은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 사진제공=한은


결국은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은법에서는 첫 번째 정책 목표를 물가 안정, 두 번째를 금융 안정으로 정해뒀습니다. 이에 한은도 물가를 우선 순위로 두고 금리를 올려 대응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자칫 정치적 이유로 총재가 공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한은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기준금리를 1.25%까지 올렸지만 중립금리에 비해 낮은 만큼 여전히 완화적이라며 금리를 좀 더 올려도 경기가 침체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만 경기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점은 통화정책에 점차 부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골드만삭스는 유가 충격 등을 감안해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2.8%로 낮췄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영향으로 전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것을 시사했습니다. 후임 총재 인선부터 한은을 둘러싼 정책 환경 변화를 주의 깊게 봐야 할 때입니다.


조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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